충남 아산에 있는 대정기계를 가보면 거대한 크레인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다양한 크레인장비들이 꼭 설치미술처럼 보인다.

이 회사가 만드는 철탑용 크레인등은 지난해부터 완벽하게 국내기술로
개발해냈다.

그렇지만 알고보면 국내에서 크레인을 최초로 국산화한 것은 2백년전의
일이다.

1792년 정조 16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 서른살의 정약용은 홍문관 수찬이었다.

그러나 진주목사로 있던 그의 부친이 4월9일 세상을 뜨는 바람에 아버지
산소옆에서 시묘를 시작하게 됐다.

그때 정조는 수원에 성을 쌓기로 결정하고 시묘를 살고있는 정약용에게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성을 쌓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줄 것을 명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이날부터 청나라에서 들어온 기기도설등을
읽으며 연구개발을 거듭했다.

이때 그가 개발한 기술은 기중가설.이는 바로 요즘의 크레인에 해당하는
거중기를 만들기 위한 기술.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크레인을 국산화한
기계공학자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산이 개발한 크레인은 모두 10개의 롤러가 장착된 특수 장비였다.

이 크레인을 이용,다산은 1794년에 수원성을 착공해 2년만인 1796년
8월에 완공했다.

이 특수장비 덕분에 인력과 비용이 크게 절감됐다.

이처럼 다산은 책상에 앉아 탁상공론을 펴는 그런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평생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5백여권의 책을 썼지만 어느 것 하나
현실을 팽개친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기울어가는 나라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열정과 의욕을 다 바쳤다.

그의 이론은 지금 우리의 실정을 가장 뼈아프게 지적한다.

그의 경세유표를 보자.그는 우리의 정치 조세제도를 우리실정에 맞도록
고칠 것을 주장한다.

특히 "행정기구를 축소하고 관리의 숫자를 줄일 것"을 촉구한다.

나아가 산업 기술 무역을 활성화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다산은 이런 개혁에 대한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당시 이 천재 실학자의 조언을 조금이라도 들었더라면 우리의
산업화는 일본을 훨씬 앞질렀을 것이다.

더 이상 OECD가입등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중소기업육성등 경제의 밑바닥
다지기에 먼저 신경을 썼다면 우리경제가 정말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은 자꾸만 잊어버리는 "다산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다산경제학상 다산기술상 다산경영상등을 제정, 매년 시상한다.

더욱이 신축한 한국경제신문빌딩 18층에 그의 뜻을 기리기위해
"다산홀"이란 행사장을 만들었다.

이곳에선 경제적인 비용으로 세미나 결혼식 토론회 발표회등을 열수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대한상의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공동으로 "경제살리기
1,000만명 서명 운동"을 이 다산홀에서 시작한것도 바로 그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뜻에서이다.

그동안 외국산 크레인을 수입해오던 회사들은 부도직전에 놓인 반면
국산크레인을 생산하는 대정기계등 중소기업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추락하는 우리경제를 국산화된 다산의 기중기로, 중소기업의
크레인으로 다시 끌어 올리자.

<중소기업 전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6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