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하면서 한국정부에 다그친 여러 말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의 하나가 투명성이다.

언필칭 돕는 입장의 그들로서 수혜측이 숨김없이 사정을 몽땅 털어놓기를
요구하는 것은 백번 당연하다.

그러나 말이란 경우에 따라 할말이 있고 함부로 해선 안될 말이 있는
법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초유의 국란중에 정권이 교체되고 여야가 뒤바뀌어서
말의 무게는 어느때보다 소중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통령 당선자를 비롯 중요한 위치에 오를 지도급 인사들의 상당수가
공직경험을 갖지 않은 상태여서 그들이 재야시절과 달리 말 마디마디에
대단히 신중을 기하지 않고서는 본인의 의도와는 엉뚱하게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점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수
없다.

무엇보다 각급 선거전에 참여했고 정당인과 의원직의 경험이 길면 길수록,
게다가 야당생활에 몸이 밴 정치인일수록 할말 안할 말을 신중히 가려야
하며 특히 대화 상대, 발언의 시점과 장소를 따져서 발언의 수준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이것은 말을 자주 바꾼다는 비판과 결코 배치되는 주문이 아님을 유의하기
바란다.

집권자 정부 경쟁자를 비판함으로써 득표를 할수밖에 없는 선거
유세라든가, 의정활동에서 비판능력과 견제기능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다.

그 결과 법으로 보장된 원내발언의 면책특권에 그치지 않고 정치인의
발언은 크게 여와 야, 원 내외를 떠나 웬만하면 사후에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 것이 관례화 내지 상식화하다시피 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엔 정치인의 말이란 액면그대로 믿을수 없고, 믿어서도
안된다는 비싼 대가가 따른다.

정부의 고위직은 말할 나위도 없고 여당 요직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의 발언은 바로 정책의 표현이거나 최소한 그와의 연결 가능성이
높기에 모든 국민에 영향을 주며 시공으로 파급효과는 거의 무제한이다.

더구나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그야말로 중천금이다.

가깝게 "대북식량 무제한 지원용의"라는 95년6월 김영삼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IMF관련 경제사태에선 그 정도가 더욱 엄청나다.

가령 환율이 2천원대로 급등한 23일 아침 TV화면의 여과없는 국민회의
의원총회장면 방영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외채가 의외로 많아 국가가 내일 파산할지, 모레 파산할지 모른다"는
대통령당선자의 직격 표현을 의총을 벗어나 국경이 따로 없는 만천하에
방송을 한것은 대단히 중대한 실수다.

그에 앞서 한 유력 의원은 외채 2천5백억달러설을 방송토론회서 앞뒤
설명없이 흘렸다.

백척간두에 선 경제난 속에 당국자 지도급인사,그리고 섣부른 유식자들의
신중한 언동을 재삼 당부하며 특별히 처음 국정을 담당할 정치인들에게
고언하는 바이다.

더구나 금융이란 루머 한마디로 멀쩡한 은행이 도산하는 성격을
지님을 유의하고 외환위기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