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라면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전해 내려 오는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전쟁을 떠올리게 된다.

트로이전쟁이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빼앗긴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되찾기위해
미케네왕 아가멤논이 총수가 되어 수만의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서 트로이성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전쟁 10년째가 되는 해에야 이타카왕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목마의 계략에
의해 허를 찔러 트로이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트로이전쟁을 주제로 한 영웅 서사시는 많았으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만이 그 뛰어난 문학성으로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트로이전쟁의 사실성은 의심을 받지 않았다.

다만 19세기 들어 비판적 사학연구가 대두되면서 허구로 취급되는 풍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대에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지역에 있는 터키 서쪽평야의 낮은 구릉에서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해 냄으로써 그 존재를 입증해 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트로이의 발굴유적은 9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래로부터 제2층에서는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과 많은 금.은제품이
출토되었다.

슐리만은 그것을 호메로스시대(기원전 15~12세기)의 트로이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뒤 다른 고고학자들은 아래로부터 제6층과 제7층 A가 고대
트로이라고 수정했다.

그동안 학자들은 트로이가 해양 이민족의 침략으로 기원전 12세기무렵
갑자기 멸망했다고 추론해 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아모스 누르 교수(지질학)는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이 아직도 활발한 지진대인 점으로 미루어 트로이가 지진에
의해 사라졌다는 주장을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슐리만 발굴에서 트로이 유적의 최하층이 기원전 4000년기말, 맨위의
제9층이 헬레니즘및 로마시대, 그 바로 밑의 제8층이 그리스인이 이민한
아르카이크 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것을 보면 적어도 9번의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각 시대의 고대도시를 매몰시켜 버렸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트로이의 또하나의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