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달 12월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짙게 깔린 공황의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선거일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한국주식회사의 사장, 즉 대통령을 뽑아야 할 시점인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모든 것은 사장 하나 뽑기에 달렸다고.

사장은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인사권을 쥐고 있다.

인사는 만사라는 얘기 하나만으로도 사장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쉽게 수긍이 간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전략수립도 사장인 대통령의 몫이다.

굵직굵직한 이권도 대통령이 챙겨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좁쌀이 백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이 한번 구르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표현이다.

대통령이 끌어온 대형사업을 효과적으로 요리하는 것은 아랫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다고 마케팅이 대통령 혼자의 책임만은 결코 아니다.

대형 딜(deal)의 향방은 대개 정상들끼리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경부고속철 사업에 대한 수주전이 한창일 때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서독 콜 총리가 우리나라를 찾았던 이유는 바로 이 대형사업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마케팅 일환이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강화도에서 가져간 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제스처까지
동원했던 것 또한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미국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연봉이 수백만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CEO 한 사람의 역할과 역량이 그만큼 크고 절대적이라는 얘기다.

나라 경제가 정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다.

표면에 드러난 우리나라의 빚은 1천2백억달러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이는 각 기업들이 현지법인을 통해 해외에서 직접조달한 부채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이들 부외부채가 최소 7백억달러로 추정된다는 소식에 접하다 보면 정말
눈앞이 캄캄해진다.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책임져야 할 빚이 2천억달러에 육박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IMF와 각국의 협조 무드 때문에 당장은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우리는 대외지급불능(moratorium)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

쉬운 말로 하면 국가파산선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외환위기를 생각해 볼 때, 요즈음처럼 국제관계를 제대로 조정해 나갈 수
있는 지도자의 출현이 아쉬운 적도 없었다.

국제문제에 있어 조심스러운 외교적 수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때다.

IMF와의 관계에서 아쉬운 쪽은 우리였다.

그래서 치욕적인줄 알면서도 IMF와의 협약에 서명한 것이었다.

그런 처지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재협상을 거론하는 등 딴소리 해대는
것은 신사도를 중시하는 지구촌 문명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비판적 여론에 밀려 입장을 황급히 수정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나라경제에 치명적 손실과
지우기 어려운 대외이미지 실추를 남긴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는 북한 위정자들에게 세계 사람들이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어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 사람들에게 이젠 남한 사람들도 북한 사람들과 똑같은 "코리안"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관례와 절차를 무시한 돌출행동으로 김영삼정부가 저지른 외교적 실수는
열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2020년 한국경제의 계획서를 펼쳐보인
때의 일이었다.

김대통령은 그의 청사진을 발표하면서 한국경제가 영국을 누르고 7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해당 공관인 주한 영국 대사관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한 영국 신문들이 이를 크게 보도한 것은 뻔한 일이다.

정치인들의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실언이 감당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경제적 손실로 되돌아 온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그 일화의 진상을 아직도 잊지 않고 되묻고 되묻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급불능의 벼랑 끝에선 우리를 바라보는 요즘 영국인들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문화 교육 역사 기술 국방력 시민의식 정치력 외교력 등 국가경쟁력을
받쳐주는 기본적인 것을 외면한 채 GNP만을 맹신, 의미없는 랭킹을 매기고
여기에 과분한 가치를 부여해온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본질을 외면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원화가치 폭락에 따라 우리가 자랑해온 1만달러 소득은 5천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국가 전체적으로는 4천6백억달러에 이르던 GNP가 2천3백억달러
정도로 떨어졌다.

수치대로라면 11번째 경제대국이라던 코리아가 졸지에 19번째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내일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아니 사장을 뽑는 날이라고 단어를 바꿔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요즘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가 제 향기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성숙된 적도 없었다.

정치 쇼나 일삼는 삼류 정치인은 필요없다.

한국은 외교력 그리고 지구촌 경제인으로서의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세계를 누비며 우리 제품을 선전하고 내다 팔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국주식회사의 차기 사장감은 외교적 수사를 아는 재무통이자 국제마케팅
의 귀재여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