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우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

국제통화기금(IMF)자금이 지원되면 진정될 줄로 알았던 외환, 금융위기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외환시장은 작년말에 비해 50% 가까이 평가절하되는등 안정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거의 매일 내놓고 있는 비상대책이 무색하게 금융및 외환시장은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고 있을까.

우선 IMF합의이후 정부가 대책마련에 워낙 쫓기면서 방향을 잘못잡거나,
일관성 없는 대책으로 시장을 매우 불확실하게 만든 점을 들 수 있다.

금융기관의 정리과정에서 정부는 여러번 말을 바꾸었으며, 급기야 정부를
불신한 금융기관까지 제 살기에 바빠 자금회수에 혈안이 돼있다.

처음에 우리는 IMF자금만 유입되면 일차적으로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여지없이 허물어졌으며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자금지원이후에도 외환시장이 안정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외국의 투자자나 차입선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의 1차 지원이후 한국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크게
실망하고 있다.

언론이 IMF의 자금지원을 국치니 신탁통치니하면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규정한 것도 문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IMF문제를 당리당략으로 이용하고 있는
정치권에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재협상 논의가 불거져나와 마치 우리경제를
볼모로 선거를 치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외국의 시각에서 보면 부도를 막아주기 위해 한국에 긴급하게 자금을
지원했더니 이제와서 한국정부가 딴소리한다는 불평을 할 수 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외국언론들은 우리의 대선주자들이
IMF재협상이나 유보의사를 밝히고 있는 점을 들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IMF권고 이행의지를 흐리게하는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애초에 대선후보의 서명 자체를 문제시하는 시각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선주자들은 형식은 달랐지만 합의각서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IMF합의이후 국민여론이 부정적으로 돌고 합의내용에 대한 비판이
일자 재빠르게 정치권은 재협상 혹은 이행유보라는 카드를 내놓고, 집권하면
IMF안을 다시 검토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물론 합의안의 내용이 우리경제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하고 남미식 처방과
비슷하게 초긴축과 금융권의 조기정리 등을 요구하는 등 가혹한 이행조건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일단 합의하고 후보들이 추인한 이상 이를 놓고 재협상을
공개적으로 운운하는 것은 우리경제의 신뢰성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본질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IMF지원은 우리의 외환위기를 종식시켜주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기업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경제는 지금 부도직전에 다행스럽게 회생가능성을
높이 산 전주를 찾아 겨우 위기를 모면한 형국이다.

우리경제의 자금난이 본질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우리가 자금난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 또
그 노력이 외국의 투자자나 거래선에 어떻게 비치는가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전주에게 재협상하자는 이야기보다는 재무구조를
건실화하고 어떻게 자구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경제가 가진 내부문제를 해결하여 국제사회에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외환위기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IMF는 자금을 대량으로 지원하기보다는 조금씩 분할해서 지원하면서
한국의 약속이행을 점검하겠다는 의지를 각서에 담고 있다.

우리의 약속이행이 불투명해지면 IMF 자금조차 구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외환금융위기를 해결하기에는 IMF 자금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외국의 투자자와 거래선이 우리의 위기타개 능력과 약속이행
의지를 신뢰해야만 우리에게 돌아와 다시 거래를 할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선후보들이 진정 우리경제를 걱정한다면 IMF합의 이행에
대한 공동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뢰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금융 개혁법안을 표류시켜 금융불안을 부추겼던 정치권이 다시 경제에
멍에를 지우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