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환율폭등에 따라 일부 생필품을 중심으로 가격인상과 함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 망국병인 "사재기"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도 국민의식이 이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특히 밀가루 화장지 설탕 등 수입원자재 의존율이 높은 생필품들의 가격이
이달초 10~20% 인상된데 이어 내년에는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형 할인점의 생필품코너는 주부들의 사재기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부 유통업체에서는 판매중단이나 제한판매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사재기를 두고 사치품도 아닌 생필품을 한푼이라도 더 쌀때 미리
확보하겠다는 주부들의 알뜰정신이 뭐가 그리 나쁘냐는 단순한 시각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과거 한반도 정세가 불안할 때마다 사재기 열풍을 보아온 터라 어느새
우리에겐 사재기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고, 더불어 이 국난을 극복해야 할 상황에서 사재기가
몰고올 경제사회적 해악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재기는 수요-공급의 원리를 왜곡시켜 물가상승의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때문에 사재기가 순간적으로는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에게도
손해를 입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회불안 심리를 부채질해 위기를 확대재생산하는 해독을
끼친다.

특히 최근의 사재기는 정세 불안이나 생필품의 공급부족과 같은 구체적
사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쁘다.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기심은 건전한 소비풍토
조성으로 작금의 경제난을 헤쳐나가려는 대다수 소비자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환율폭등의 후유증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경우 원가상승에 따라
공산품 가격과 공공요금 등에 인상요인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상요인이 있다 해서 무조건 가격인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소비수요가 줄어들면 오히려 가격이 떨어질수도 있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원리이다.

결국 물가문제 역시 소비자들의 손에 달렸다고 할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국민들이 현 위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다.

이같은 소비자들의 각성에 대해 외국언론들은 한국정부가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한채 또다시 국민들의 애국심 하나에 호소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번 위기는 국민들의 협조 없이는 도저히 극복할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다.

위기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지만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경거망동으로는 이 혹독한 "IMF겨울"을 견뎌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기업-정부가 서로간의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어찌 외국인들이 우리를 믿을수
있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