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시골 초가집 지붕위 둥근박이 있는 풍경은 평온과 소박함을 맛볼 수
있게 했다.

강남제비와 박씨, 그리고 톱으로 박을 켜는 흥부얘기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바가지는 둥글고 소박하게 생긴 박으로 만든 그릇이다.

가을에 박을 따서 반으로 켜서 속을 파낸다.

그리고 삶아 속을 파내고 겉을 긁어 말린다.

그러면 바가지가 된다.

요즈음은 플라스틱바가지에 밀려 거의 볼 수 없으나 박으로 만든 바가지는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집집마다 필수품이었다.

물을 푸는 물바가지, 쌀 푸는 쌀바가지, 소먹이 푸는 쇠죽바가지 등
종류도 다양했다.

바가지는 우리민족과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에서 나왔다는 설화는 유명하다.

삼국유사에는 바가지를 두드려 악기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에서는 지금도 해녀들이 바다에 뜨는 부양구로 쓰기도 한다.

박은 실용성을 넘어서 생활 풍습 또는 민속신앙속에도 많이 스며들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남녀어린이들이 색깔을 물들인 호리병박을 차고 다니다
정월대보름 전야에 남몰래 길가에 버리면 액을 물리친다는 기록이 있다.

가정에서는 바가지 파편이 아궁이에 들어가면 불길하게 여겼다.

속담에도 바가지라는 말이 들어있는 것이 여러개 있다.

바가지는 깨진 데서 샌다, 바가지를 찬다, 바가지로 바닷물을 된다,
바가지를 긁는다, 바가지를 썼다, 바가지 싸움만 시킨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에게 "바가지"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궁금하다.

아마 남에게 속은 "바가지썼다"는 말이 우선 생각날 것 같다.

서울등지의 13개 유명 종합병원이 지난 한햇동안 26만1천여명으로부터
1백58억원을 부당하게 챙겼다 한다.

의료보험체계와 진료비내역을 잘 모르는 약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눈뜨고 코베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무식해서 해를 입거나 인심이 몹시 사납다는 뜻이다.

이런 눈뜨고 코베이는 세상에 머리에 "바가지"를 쓰고 있으니 주머니돈을
털리는 것은 당연할지 모르겠다.

어려운 세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