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가장 치욕적인 욕은 "거짓말쟁이(You are a liar)"라는 말이라
한다.

IMF합의문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재협상 운운함으로써 우리의
대외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는 한국이 합의를 안지키는 순간 IMF의
자금지원은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의 정치인들이 전기의 플러그를 뽑아 버리는
짓들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미 우리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여건은 IMF합의 이전보다 훨씬 나빠졌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결국 지불불능(moratorium)선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다.

IMF로 부터의 지원으로 자존심이 상한 것은 어쩔수 없지만 너무 치욕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IMF가 지원대상국에 자금지원조건을 부과하는 목적은 지원대상국의
경제운용에 대해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외지급능력확보로 융자금의
안전한 회수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단 합의를 성실히 지켜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면
합의내용의 재조정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경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외세의 협조를 받을수 밖에 없는 사실과, 이보다
더 수치스런 것은 이렇게 되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네탓만 하고 있는
현실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번 IMF가 제시하는 개혁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우리 정부가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것으로 그 속도만 다를 뿐이다.

IMF는 환부를 일시에 수술해야 한다는 빅뱅식이고 우리 정부는 경제에
주는 충격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책임을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

책임질 것이 있으면 져야 한다.

그러나 정책이란 불확실한 예측을 기초로 정책수단을 선택하는 행위일진대
판단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아무도 소신있는 행정을 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경제가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정경유착이고, 이는
온 세계가 다 안다.

IMF와 세계은행이 일차적으로 요구한 것이 실명제의 골격을 유지하고
회계와 거래의 투명성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정직성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소의 금융사고치고 정치권이 개입안한 것이 있었는가.

이번 IMF와의 합의는 쓰지만 우리의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삼키지
않을수 없는 약으로 제대로 소화만 하면 좋은 보약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최근 극심한 금융시장 불안의 근본적인 해결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이렇게 어수선한 나라에 누가 돈을 빌려주려고 하겠는가.

우선 부실한 금융기관을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

정부는 살릴 것과 죽일 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현재 심한 부실로 공신력을 상실한 종금사는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은행의 폐쇄는 심각한 금융위기가 예상되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들의 구제를 하지 않을수 없다.

각국의 부실금융기관 정리사례를 보면 일부 금융기관의 퇴출이 금융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확대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 인수합병이나 폐쇄
등으로 신속하게 퇴출시키고 퇴출로 심각한 금융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큰 경우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개 시중은행에 각각 1조1천8백억원의 출자를 통해 사실상 국책은행화하고
여타은행에 대해서도 연.기금 등을 동원하여 은행의 후순위채를 매입,
자기자본 확충을 지원한 조치는 너무나 당연하다.

스웨덴 등 북유럽3국과 멕시코도 부실은행의 국유화를 거쳐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건실한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최근의 신용경색은 은행이 여유자금이 있는데도 나만 살아남겠다고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데도 원인이 있다.

경제가 무너지고서야 은행의 생존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주가가 빠지거나 환율이 올라가면 BIS비율이 엄청 내려간다.

이런 상황에서 대출 축소로 BIS비율을 올리겠다는 발상은 장님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는 격이다.

대출의 축소로 멀쩡한 기업까지 도산하면 부실채권은 더욱 늘어나
BIS비율은 더욱 낮아진다.

이번 IMF합의에서도 앞으로 은행들이 BIS비율을 맞추는데 2년정도의
여유를 주고 있다.

대손충당금이나 주식평가충당금도 당장 1백%를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금융시스템의 안정에 앞장서야할 은행들이 나만 살겠다고 호들갑을
떨수록 모두 공멸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