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조용한 시국이었더라면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한반도관계 4자회담은
남북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훨씬 더 주목을 받아야할 장소였다.

적어도 휴전 이후 44년간 세계의 화약고로 꼽혀온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한다는 명분에서 그렇고, 본회담 성사를 위한 수차의
예비회담부터 적잖은 힘이 끼어 마치 본회담개최 자체가 최종목적인 것으로
착각될만큼 어렵사리 성사된 대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대에 비추면 9일 첫날의 대좌는 예상을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삭막한 공기속에서 막이 올랐다.

그것은 4국 대표의 기조연설에서 잘 반영됐다.

4자중 한.미.중 3자의 인식은 표현만 달랐지 남북한간의 화해와 신뢰구축이
문제해결의 핵심이라는데 대체로 일치를 보인 반면 북한은 주한 미군 철수,
미.북간 평화협정 체결을 한반도 평화-안정의 전제로 내세웠다.

가까이 보면 한.미는 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전적으로 남북간
긴장완화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기 보다 92년 체결된
남북간 기본합의 이행만으로 충분하다는 맥락임에 비해, 중국은 남북한 화해
신뢰위에다 미.북관계 개선을 동시에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바꿔 말해 한.미.중 3자가 남북화해 선행을 기조로 함에 반해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미.북관계 개선을 변함없는 선행조건으로 고집한 점에서
극명하게 대조된다.

우리는 여기서 어느쪽에 설득력이 있느냐는,역시 판에 박은 질문을
제기하기보다 한발짝도 진전이 없는,그래서 대화 상대방은 물론 제3자
모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전략을 북한이 어째서 전가의 보도처럼
애지중지하느냐를 살펴보는 쪽이 이 회담을 이해하는데 보다 쉬울것 같다.

여기서 빼놀수 없는 것이 미국의 반응과 남한의 사정변화라고 해야할
것이다.

북한의 인식으론 핵문제대치 이후 수년간 미국의 대북접근 기본태도가
이른바 "연착륙"이란 표현으로 압축되듯이 융통성있는 방향으로 옮겨간다는
판단이 능히 갔음직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특히 최근의 급격한 경제악화와 정국개편을 포함한
남측의 사태변화를 북한이 과연 어떤 시각에서 파악, 4자회담등 대남전략에
반영하느냐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높을수 밖에 없다.

마침 신포 금호지구 남한근로자들의 대선 부재자투표를 정치행위라는
이유로 반대한 북한태도에 마주쳐, 4자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내심이 얼만큼
들여다 보인다.

현정권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한 새정부에 대한 의사표시로서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하며 동시에 대북제재 완화 등 미국의 더 많은 양보를
염두에 둔 행위라고도 볼수 있다.

따라서 4자회담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정부는 미.중과 긴밀한 공동보조
아래 한국의 진의가 평화위의 공동번영임을 북에 확신시켜 남북대화 선행을
꾸준히 이끌어내야 한다.

결국 새정부가 발족한 뒤에는 4자회담이 제대로 진척되도록 분위기가
성숙되길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