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2월초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드러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있다.

현대의 영웅, 새 세계의 교주, 미래의 황제는 미국의 대통령도, 대영
제국의 총리도, 러시아 대통령이나 중국의 국가주석도, 로마교황도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40대 빌 게이츠이며, 인텔의 앤디 그로브였다.

그로브와 게이츠가 등장하는 자리는 1주일간의 다보스 회의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렸다.

이 새 영웅, 교주, 황제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지난달 19일부터 3일간
제1차 아시아-태평양 정보기술정상회의(APITS)를 열었다.

실리콘밸리의 산물인 APITS에서는 인텔의 그로브, 오라클의 L 엘리슨,
넷스케이프의 J 박스데일, 시스코의 J 챔버스, 에이서의 스탄신,
다이아몬드의 이종문, 그리고 뉴스그룹의 R 머독까지.

물론 조연에는 미국의 클린턴과 필리핀의 라모스대통령,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대만, 한국의 산업-정보통신 장관들과 보잉의
L 클락슨회장과 아시아지역의 기업계 기술계 학계인사등 모두 5백여명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가장 빈도높게 나온 단어는 "혁명"이다.

18세기 산업혁명과 비교해서 나오는 정보혁명, 전자혁명, 컴퓨터혁명,
인터넷혁명, 네트워크혁명, 디지털혁명, 전자상업(E-C)혁명.역사적 안목이
서투르고 기능적 접근이 승한 미국 백악관보좌관 I 매거니너의 입에서도
E-C의 역사적 혁명성을 강조하는 결론이 들리고, 세계최대 컴퓨터 회사인
대만 에이서의 주인 스탠 신의 입에서는 문명이 동양에서 시작하여 서진,
이제 미국을 거쳐 태평양-아시아로 오고 있는 것은 세계 10대 PC생산자중
유럽이 하나도 없는 것을 예증하며 정보혁명이 이제 동양에서 생활의
질향상을 위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들 정보기술 유통의 혁명아들이 영웅, 교주, 황제로 군림하는 것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바로 산업의 판, 사회의 틀, 문명의
패러다임을 새로 짜는 세기적 창업자, 문명의 개척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 창업자들이 아무리 "성공"이라고 큰소리쳐도 그것은 모두가
이미 이 세상에 있는것, 그것도 일본이 먼저 성공한 것을 복사 모사한 산업을
정부의 보호아래 뒤따라간 것 뿐이다.

문명사의 주역이나 세계를 바꾸는 새산업의 주역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정보-전자혁명을 선도하는 주역들의 공통된 점은 비전과 전략과 기술과
생산과 경영이 모두 탁월하다는 점이고, 모두가 정열적이라는 사실이다.

기술만 있고 경영이 부족하다던가, 비전과 전략만 있고 기술과 생산이
없다던지 하는 일이 없다.

모두들 갖추고 있다.

정보혁명의 메카 실리콘밸리를 배후에 두고 미국과 태평양을 잇는
샌프란시스코의 지리적 이점이 APITS회의를 가능케 했고 여기서 미국이
국책으로 전개하는 것은 전자상업(E-C)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지서부터 그로브의 기조연설, 매거니너 보좌관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정보기술산업 외교의 핵심은 E-C이며
전세계적으로 E-C를 제도화해야겠다는 의지를 또렷이 천명하고 있다.

97년 현재 50억달러의 기업간 E-C거래가 2000년까지 3천억달러에
이를것이고 E-C가 바로 "21세기 성장의 주역"이라는 믿음을 선포하고
있다.

민간주도, 시장주도, 정부의 개입최소화, 시민의 힘에 의한 보호, 세계화
등 5개 원칙에서 비관세 계약방식 지불조건 시장접근 지적재산권 기술기준
등 구체적 실천방안을 국제협약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언제나 역사의 주역,산업과 사회혁명을 창조하는 주역이
될수 있을까.

작은 대만은 PC와 PC관계 부품제조에서 세계를 압도하고 소프트웨어에서는
인도 베트남 필리핀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실리콘밸리까지 침투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에서도 양만 일본에 처질뿐 질과 성공면에서는
단연 돋보인다.

이번 APITS에도 60여명의 최대 참가자를 보내고 2000년에 정보기술산업
세계총회를 주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마저 "산업대국에서 국제빈민"으로 전락한 양상을
묘사하고 "한강의 기적"모델은 가장 잘못된 모델이라는 독일 투자가의 말을
월 스트리트저널지는 인용보도하고 있다.

세계와 인류를 상대로하는 창조의 작업, 새문명, 새사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의지와 비전과 전략과 진지함이 없이 오로지 모방에 만족하고
거품을 즐기는 그런 지도자 그런 백성이 있는 한 국제거지가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다.

지금은 그 어느 외국에도 물을 때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정말 우리는 언제까지 모방자 추수자 조역 거지근성 놀부근성에 머루를
것인가.

인류역사의 주역 문명창조의 담당자로서의 의지를 세우고 땀을 흘릴
각오는 영 없는 것인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