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지난 95년 주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3%가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가계부를 쓰지않는 사람의 비율이 94년의 37.5%보다 5.5%포인트나 높아졌다.

"아직도 가계부를 쓰십니까"라는 비아냥조의 말이 귀에 더 익었을 정도로
우리의 가정에서 가계부가 사라진지 오래다.

가난한 시절 알뜰살림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가계부.

그런 가계부가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는 것은 과소비가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반증이다.

"거품시대"

우리의 소비행태는 한마디로 분수에 넘치는 과소비였다.

소비는 대형화 고급화되었다.

너나없이 "제"를 찾았다.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한국형 소비신화도 그래서 생겨났다.

여기에는 과시소비 모방소비 뇌동충동소비 등 불합리하고 건전치 못한
소비행태를 오히려 모방해야할 "삶의 양식"으로 규정한 사회분위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야 내 신분이 높고 품위가 난다는게 사회적
인식이었다.

신용카드 빚은 못갚아도 그랜저승용차를 타야 만족해 했다.

은행대출을 받아서라도 해외여행은 가야만 했다.

이제 이런 과소비문화에 "아듀"를 고해야만 할 때가 됐다.

국가가 외환위기로 사실상 "부도"의 위기에 처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자금지원을 하면서 한국의 거품경제구조 자체를 뜯어 고치려고 하기 때문
이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홍역을 치르고 나면 소비문화는 대대적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내년 경제성장률이 전례를 찾기 힘든 3%대의 저성장에 접어들고
기업구조조정으로 직장 잃은 가장이 "흰손(백수)"이 되면 정부나 언론이
과소비를 하지 말라고 떠들지 않아도 빈약한 주머니가 서민들을 "짠돌이"로
만들 수밖에 없다.

소비성향은 "하방경직성"이 강하다.

한번 올라간 소비수준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돈쓰던 가락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어떻게 줄이느냐는 항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소비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면 소비자파산밖에 없다.

"IMF 신탁통치" 아래서는 실업자는 늘고 임금은 동결된다.

주식도,부동산도 돈이 되지는 못한다.

사회가 점차 투명화되면서 "공돈"도 사라진다.

여기다 정부가 긴축을 할 경우 세금부담이 늘어나고 각종 사회보장비
지출증가로 내주머니에서 마음대로 쓸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날로 줄어들게
뻔하다.

따라서 앞으로 소비전략은 "계획소비" "합리적 소비"가 될수밖에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어디가면 한푼이라도 싸게 살수 있는지"가 관심사가 될것이다.

다시 가계부를 쓰고 쇼핑리스트를 만들어 가격을 꼼꼼히 비교하는 주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선진국처럼 1달러 아끼려고 신문에 난 쿠퐁을 오리는 일이 단란한 가정의
한장면을 상징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돈많이 버는 "재테크" 책보다는 선진국처럼 돈 적게 쓰는 알뜰소비
(페니 핀치) 책이 더 인기를 끌 수있다.

이런 현상은 지난 93년부터 경제의 거품이 걷히면서 경기침체기에 들어간
일본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소득증가율이 지난 93년 14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이에 따라
식료품 옷 신발 등 기본소비마저 줄어들었다.

소비자들도 고급에서 저가격으로 취향을 바꾼지 오래다.

할인점이 번성하고 값싼 PB(자체상표제품)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우리도 "과소비여 안녕"이란 작별인사를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합리적
소비로 갈 수밖에 없는 길목에 접어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