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IMF의 유동성조절자금을 요청한 것에 대해 비분강개하며 우리경제가
거덜이 난 것처럼 법정관리를 받게 되었다느니,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느니
하며 낙담하는 소리가 크다.

외환 유동성을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국제기구의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우리의 의지와 현명함이 있다면 결코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아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패배의식과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남에게 기대하는
그릇된 풍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난날을 자성하고 오늘의 현실에 모두 다
응분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기혁신의 의식개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시민운동으로
승화돼나가야 한다.

성실한 시민으로서 전체 사회의 공영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채찍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집도의 고뇌와 같이 정책당국자의 어려움도 이해하여 협조하고 격려함으로써
화합하는 슬기도 보여줄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나고 있는 시민들의 "경제살리기"운동이야
말로 천마디의 말보다도 행동의 중요함을 잘 일깨워주고 있다.

올바른 행동은 현실의 정확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지난날의 압축성장과 1987년 이후 민주화과정
에서 나타난 각계의 욕구분출에서 비롯된다.

주어진 현실을 효과적으로 수렴하여 국민을 단합시키고 이끌어가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눈치나 보고 아부하는 것으로 전락하여 일시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시책들로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를 정착시켰다.

근로자들의 과격한 노동운동은 해마다 20%가 넘는 임금인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화합을 전제로 해야할 생산현장이 오랜 갈등과 대립의 장이 되어
왔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현상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우리가 정부를 탓하고 정치지도자를 비난하지만 진정으로 국가와 우리
모두의 장래를 생각하고 귀중한 한표를 행사하여 능력있는 정부와 정치지도자
를 선택했는가.

지역적 편견과 학연이나 개인적 이해를 앞세워 귀중한 투표권을 행사하고
정치지도자를 선택하였는가.

이 모든 오늘의 결과는 우리의 책임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지
깊이 자성을 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정부는 종합적 균형과 장기적 안목으로 당면문제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며 과감한 긴축을 통하여 허리띠를 졸라매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당황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경계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의 어려움이 실물경제의 부실에 있다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과
기업인에게 있다.

경영환경의 변화를 외면한 채 외형위주의 방만한 확장정책을 추구하다
좌초한 결과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호도될 수가 없다.

뼈를 깎는 자구책과 경영혁신을 통하여 소득과 고용의 원천으로서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근로자는 생산성을 올리고 부가가치를 증대시킴으로써 소득의 향상을
꾀하려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야 하며 직장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수익력
있는 사업장을 만드는데 응분의 책임을 분담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연 50~60%가 넘게 늘어난 고급 의류와 가구 및 양주
수입, 일본의 2배가 넘는 가구당 외식비 비중, 미-일 양국의 4~5배가 넘는
에너지 소비증가율을 통하여 1만달러 소득수준을 얼마나 흥청거리고 살아
왔느냐를 알아야 한다.

능력을 뛰어넘는 소비의 결과는 파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근검
절약하는 우리 전통의 미덕을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이러한 철저한 반성과 내탓이라는 자각속에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IMF의 지원과 협력을 받는 것은 결코
우리경제가 다른 나라의 신탁통치를 받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들의 조언과 지원으로 보다 손쉽게 당면한 어려움
을 극복하는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물론 최근 멕시코 등 중남미 제국의 경제회복은
좋은 선례가 되고 있다.

IMF의 지원을 받으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재정의 긴축이 불가피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부실기업이 더늘어 경제성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경제시책과 운용을 그들에게 다 맡기는 것처럼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지원자금의 조속한 회수를 위하여 우리
경제가 하루속히 건전한 방향으로 회복되도록 필요한 정책권고와 조건을
제시하는데 불과하다.

부실의 정리와 금융시스템의 건전성회복, 이를 위한 재정긴축 등은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불가피한 개혁과제로 되어 왔다.

우리가 보다 과감하게 앞당겨 실천하였더라면 오늘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IMF 때문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폭과 시기의 완급이 관점에 따라 다를
수가 있으므로 꾸준한 협의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에 가장 적절한 대안을
찾아내면 된다.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 하나은행 회장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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