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

몇해 전 미-일 구조조정협의에서 주요 현안이 되었던 주제가 일본 기업
특유의 계열(게이레쓰)조직이었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시장도 아니고, 독립적인 기업도 아닌 어중간한
체제인 계열 조직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일본 시장을 침투하기가 힘든 터라 미국측은 계열 조직을
해체하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바가 있다.

이때 일본 학계에서는 계열화의 정당성 여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일본내에는 일본의 기업집단이나 계열화에 대한 연구자들이 많다.

특히 이들 가운데서 스탠퍼드대학 교수로 국제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는
아오키 교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일본의 계열연구를 해온 인물이다.

그의 저술은 경제적인 효율성이나 환경적응성 면에서 일본의 계열이
우수한 체제라는 것을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바 있다.

뿐만 아니라 스탠퍼드대학 일본연구소의 이마에 소장이나 경영학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는 이타미 교수 등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이 미국측의 요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비슷한 상황이 IMF와 한국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지난 1일 캉드쉬 IMF총재는 "한때 유용했던 경제모델도 수명이 있게
마련이며, 따라서 낡으면 버려야 한다"며 "한국의 재벌기업과 인도네시아의
독점기업은 폐지(abolition)해야할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바 있다.

그의 생각을 반영이라도 하듯 IMF는 재벌체제의 개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요구에 대한 한국측의 반응은 정부로부터 일부 식자층에
이르기까지 찬성하는 분위기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집단의 선단식 경영과 차입경영에 현경제위기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우선 캉드쉬 총재가 어떤 길을 걸어온 인물인지 필자는 정확히 알수 없다.

그러나 짧은 인터뷰 내용을 미루어 보면 제도나 체제에 대해서
사회공학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가 기업집단이라는 기업조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식은 아마도 그동안
서구 언론들이 제공해왔던 가족지배, 내부거래, 공격적 경영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심지어 시장원리에 가장 정통하다고 알려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들이나
파이낸셜 타임스에서도 한국 기업집단의 실체를 정확하게 진단한 기사를
본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업집단이라고 불리는 체제를 정부가 금융및 세제지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캉드쉬 역시 이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없앨수 있다고
생각한 것같다.

그러나 금융및 세제지원이 한국에서 기업집단의 등장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 등 아시아권에서는
서구에서 관찰할수 없는 독특한 기업체제인 기업집단들이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업집단은 금융시장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고, 부품이나 소재공급의 조달이 원활하지 않고 조달 비용이 높으며,
경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크고, 신뢰수준이 낮고 계약이 쉽게 파괴될수
있으며, 가족간의 유대감이 강한 곳에서 등장하는 기업체제임을 알수 있다.

이는 기업집단이 시장에서 직접 거래하는 비용이 많이 드는 곳에서
등장하는 기업체제임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업집단이란 거래비용이 높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적응과 진화의 결과물임을 알수 있다.

인위적인 창조물이냐, 아니면 진화의 결과물이냐에 따라서 기업집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라질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실상을 국내외에 알릴수 있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수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외국이나 국내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았지만,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기업집단 연구를 제대로 해온 사람이 아주 드물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연구결과가 영어 문헌으로 번역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외국의 식자층들이 한국의 기업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국내외 언론이 그리는대로일 것이다.

미-일 구조조정 협의과정이나 IMF 협의과정을 비교해 보면 한 나라의
힘이 기업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채 자신들이 갖고 있지 않는 체제를 전부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외국인들에 당황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에 찬사를 보내는 일부 사람들의 순진함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노력을 누군가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