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금융권 뿐인가.

수만명을 고용하는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그칠줄 몰라 나라경제가 송두리째
와해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시시각각 죄어드는 가위 국난의 와중이다.

이런 가운데 국사를 총체적으로 다뤄야 할 정치권은 오로지 대선에 매달려
그밖의 일엔 말잔치뿐, 국회 본연의 입법기능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막판 진통을 겪은 IMF(국제통화기금)협상도, 협약대로의 신속한 입금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실은 그 후의 몇주가 훨씬 더 중차대한 시기임을 우리 모두
간과해선 안된다.

당장의 9개 종금사의 영업정지 파장을 시작으로 2,3개 은행의 존폐위기,
이미 한라그룹으로 불거진 자금경색 기업들의 연쇄도산 등 사태의 심각성은
경제개발사 40년을 통틀어 최대의 위기임이 틀림없다.

이 험난한 파도를 누가 나서 헤쳐나가야 옳은가.

물론 정부 기업 노동자 소비국민 등 경제주체의 어느 하나도 나몰라라
뒤로 물러설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

각 정당과 후보들이 말재간으로 책임을 핑퐁치듯 서로 미룰 계제는 더욱
아닌 것이다.

그러나 순리로 보아 타순은 정치권 차례다.

설령 대선에 걸린 그들의 이해가 아무리 다급하다 하더라도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는 발등의 불을 달려들어 끌 책임은 국민을 대표한 국회가 져야 백번
당연하다.

열일 제치고 나서서 정부를 채근하며 필요한 입법의 준비활동부터
서두르는 것이 순서다.

만일 오랜 타성대로 이번 일에 국회가 또 늑장을 부린다면 대선의 승패에
관계없이 정치권이 연대로 국민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중대 국면이 오고야
말 긴박한 시점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로나 당혹한 정부관료들의 경황으로나, 무엇보다 문제의
성격으로 국회를 중심한 정치집단이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대선승패이니
경제위기 대처는 정부가 알아서 법안을 만들고 국회는 그걸 통과만 시키면
할일 다한다"고 외면할 성질이 전혀 아닌 것이다.

얼른 짚이는 것만 보자.

폐합되는 금융기관의 예금자보호에 관한 보완입법, 은행 부실채권 대불에
필요한 예산조치와 새해 정부예산의 재심, 도산속출에 따른 정리해고
2년유예조치 수정, 실업폭증 대비의 각종 입법,외국 노동력에 관련된 법정비,
외은 진출에 대비한 은행법정리 등 직접 간접의 입법사항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아 보인다.

이런 것들을 과연 임기말 정부의 관료에만 맡겨놔도 괜찮다는 것인가.

더욱이 현 국회 임기는 2년여가 남아 국운을 건 이 막중한 입법을
최단시일 안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야 말로 분명 15대 국회가 떠안은
역사적 임무가 될 것이다.

이 시점이 어떤 시점인가.

기대리에 출범한 문민정권이 실정거듭 끝에 만기를 석달 앞두고 30여년
좋이 쌓아 올린 국운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위기에 부닥친 것이다.

거기다 여당없는 전원야당 국회인지라 정부와 국회는 아무 연계도 고리도
없는 채 따로 논다.

대선을 연기는 못할 망정 국회는 대선 공세우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임무를 다하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