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서 <삼성경제연구원 국제담당 사장>

최근 IMF 구제금융 신청이후 세계 최대 금융회사의 그룹본부 기획실
실력자가 필자를 방문, 한국경제 위기에 관한 토의를 하고 갔다.

처음에는 한국의 금융위기, 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 노동시장의 탄력성
회복문제및 한국정부의 규제완화와 시장경제 활성화에 관해 공감을 서로
피력한 뒤 자연스럽게 세계 경제문제로 논의가 옮겨가고, 토론이 끝날 즈음
공동의 결론이 "한국경제가 무너지면 미국 경제도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끝을 맺었다.

한국의 산업과 금융부문에 이미 투자한 이들 외국 금융회사들은 앞으로
5백억~6백억달러를 새로 투자해야할 IMF와 그 입장이 반대였다.

IMF의 거시경제에 대한 과잉 안정화요구(overkill)가 한국경제의 회복과
투자가치 재상승에 너무 긴 시간을 요구토록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이번 사태로 한국경제는 이제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거쳐 훨씬 더
건실한 산업과 금융으로 21세기에 도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라고 설명해도
불안감을 없앨수 없는 모양이다.

케인스가 걱정한대로 금융인의 단기적 시각과 산업인의 장기적 시각이
직접 충돌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한국도 세계 10대 경제로서 여기서 발생하는 긴축의 파장은
상당히 길 뿐만아니라 대미 무역적자를 연1백억달러나 내고있으며, 동북아
외교-안보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나라의 경제를 쑥밭을 만들면 미국이나
IMF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했더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내친김에 아예 "미국이 다음번 동아시아 경제(금융위기에 말려들 국가란
뜻)인 것을 아직 모르느냐"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란다.

동아시아 금융사태의 본질은 이들 국가가 환율과 금융시장의 고평가상태를
오래 방치해 둠으로써 산업의 경쟁력까지 잃게 만들고, 결국 시장이 떨어진
실력에 걸맞는 환율과 증권가격을 억지로 떠안겨준 것에 있다.

지금 전세계에서 고평가된 환율과 증권시장을 하향조정하지 않은채
방치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한나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미국 경제를 동아시아와 같은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지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냐고 했더니, 그건 절대 찬성할수 없단다.

물론 그렇게 되면 사실 참 큰일 날 일이다.

이것은 세계 대공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은 산업과 기술이 탄탄해도, 미국의 금융은 대일본 의존도가
엄청나다.

지난 10여년간 일본의 금융산업은 약1조3천억달러(미국정부 총차입의
5분의1)정도의 외국 주식과 정부채를 매입했고, 그중 3분의2이상이 미국에
흘러들어갔다.

이것은 일본이 일관된 중상주의적 무역정책을 전후 50여년간 꾸준히
추진한 결과, 최근 연6백억~1천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누적시킨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큰 불균형을 세계경제가 과연 얼마나 지탱할 것인가는 누구나
불안해 하던 과제지만 이제 드디어 일본 국내문제로 인해 이 불균형이
밖으로 불거져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금융기관들도 지난 20여년간 토지를 담보로 융자하고, 토지가격이
상승하면서 더불어 발생한 금융버블과 증권을 담보로 융자하고, 증권가격이
상승하면 더 융자하는 증권버블을 만들었다가 터지는 경험을 뼈아프게
겪고 있다.

거기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남아 버블이 다 터지고 이제 굵직한
한국버블, 홍콩버블까지 터지기 시작했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한국에 투자한 수십조원의 자산(약24조원 규모)이
부실화하면 미국 재무장관 루빈이 아무리 일본에 애원해 해외투자 환수를
하지말라고 해도 안할수가 없다.

미국내 일본의 투자자산은 역사상 최고 가격을 유지하고 있으나 무역구조가
극도로 취약하므로 언제 하향조정에 들어갈지 알수 없다.

따라서 지금이 바로 투자환수의 최적기이다.

즉 반년전 동아시아 경제와 똑같은 상황에 와있다.

한번 팔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팔아치우는 증권과 환시장의
생리상 다음번 동아시아 국가와 같은 사태가 미국에도 들이닥쳐 대시장조정이
시작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동남아시장 붕괴정도로는 전반적인 일본의 해외투자 환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경기긴축이 어느정도 진척되고 산업 금융 조정이 순조로우면
일본의 해외자산 환수가 필요없다.

다만 한국의 구조조정 작업이 너무 늦거나, 각종 저항으로 아주
부진하거나, 거시경제관리를 너무 긴축시켜 좀처럼 부실채권이 살아나지
못하고, 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국가들이 모두 같은 부진을 면치 못하면
일본의 외자환수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 때가 미국 금융시장 대조정의 시발점이 된다.

이젠 미국이 잠에서 깨어나서 한국경제 살리는 일을 자신의 일처럼
우리와 더불어 처리할 때가 됐다.

미국의 대한국 투자가들은 서울에 올 필요가 없다.

워싱턴으로 가서 설득하고 장기적 과잉긴축을 막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