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아침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30대그룹 기조실장회의는 신임
정해주 통상산업부장관과의 상견례를 겸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위기극복능력 부재에 대한 성토가 적지 않았다.

또 당장 긴급대책을 마련해 기업의 자구노력을 실질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요청도 쏟아졌다.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의 정도가 워낙 심각하다보니 과거와 같은 의레적인
상견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식사도 평소 전경련 조찬행사의 단골메뉴인 "어메리칸블랙퍼스트"의 절반
값에 불과한 해장국으로 떼웠다.

기조실장들의 주문은 강력하고도 실행력있는 초단기 금융안정책 촉구에
집중됐다.

A실장은 "강제통폐합을 우려한 금융기관들이 만기가 도래한 차입금은
무차별적으로 회수하면서 신규대출은 거의 중단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긴급명령 발동을 통해서라도 만기도래차입금의 상환은 한시적으로 유보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B실장도 "극히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기업어음(CP) 매입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의 금융시장"이라며 "이대로 놔두면 금융시장의 신뢰가
무너져 금융시스템이 완전 붕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위기의 실상에 대한 솔직한 고백도 적지 않았다.

C실장은 "수치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부 호조와는 달리 기업의 현실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며 "이게 모두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해왔던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D실장도 "정부는 아직도 실물경제는 괜찮다고 하는데 실물경제의 주체인
기업이 다 죽어도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묻고 싶다"며 "은행이 부도나면
멀쩡한 기업도 흑자도산하게 돼있다"고 우려했다.

정장관에 대한 건의는 구조조정 지원에 집중됐다.

특히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실천력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E실장은 "지금의 제도하에서는 한계사업을 합병하는데 최소 2년이 걸린다"
며 "구조조정특별법 제정을 통한 근본적인 제도개혁이 어렵다면
한시적인 유보조치라도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F실장은 "외국에서는 우리 정부가 대안은 많은데 실천은 없다고 비판한다"
며 "한가지라도 제대로 실천되는 것이 있어야 기업도 불안에 떨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기조실장들은 이날 회의에서 또 <>유사중복사업 통폐합 <>비수익성 사업
정리 <>비업무용 자산매각 등에 주력하는 등 기업 구조조정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전경련내에 "경제위기극복 비상대책반"을 편성, 민관합동으로
대외신인도 제고 활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정장관은 "기업의 자구노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모든
지원책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하고 <>부실기업 인수때 출자총액 제한의 예외
인정 <>증권거래법상 의무공개매수제도 완화 등 기업구조조정 촉진을 위한
제도정비 방안을 내달초까지 확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모그룹 기조실장은 회의직후 "얘기는 진지하게 해봤지만 통산부 역시 또
다시 재경원과 공정위 등과 업무협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기업들의 건의가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힘없이 말했다.

이날 회의에는 이문호 LG 박용근 대우 손길승 선경 옥종석 한화 김병일
롯데 이가헌 효성 이종훈 동아 박성석 한라그룹 기조실장 등 33개그룹의
기조실장 및 기조실관계자가 참석했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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