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찬 <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

나라가 온통 벌집을 쑤신것처럼 어지럽다.

연초부터 대기업의 잇따른 부도에 이어 이제는 환율 주가 금리 등 모든
것이 불안하고 금융기관의 부도, 심지어 국가경제의 도산까지 걱정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경제에 작금의 대선분위기까지 혼탁하여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 모두가 오늘의 상황인식을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해온 결과이다.

경제주체가 되는 정부 기업가 근로자 가계 모두가 자기할일을 못했다.

기업부도는 금융기관의 부실과 국제적 신인도의 저하로 나타나서 외환위기
로 치달았다.

우리의 가정살림도 국가의 경제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고통을 분담하기
보다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다.

금년도 해외여행 경비가 80억달러에 이른다니 정말 한심하다.

며칠전 새로운 경제팀이 발표한 금융안정화 대책의 취지와 기본방향은
옳다고 본다.

금융산업도 국가의 중요한 간접자본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항만이나 도로보다 더 중요한 기간산업이라 할수 있다.

국가를 지탱해 가고 있는 각종 사회간접시설과 기간산업이 우리 몸의
핏줄이라면, 금융산업은 그 핏줄에 흐르는 피와 같다.

피가 맑지 못해 썩거나 균형이 파괴되면 핏줄은 물론이요 우리몸도 망쳐
버리고 만다.

나는 2년전에 기업 경영활동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오랫동안 일해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직도 물러나 명예회장직에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심정으로 2002년 월드컵
조직위 위원장직만 맡고 있다.

우리에게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축구의 차범근 감독이 국민의 영웅이 되고,여자마라톤의 권은주가 48kg의
가녀린 몸으로 한국신기록을 거의 5분이나 단축하였다.

미국에서 잠시 돌아온 박찬호가 어린 꿈나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나는 경제도 스포츠에서 우리선수가 이루어낸 성과를 본받아 꼭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본다.

아직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돌이켜보면 경제위기는 항상 있어 왔다.

저 처참한 6.25 동란을 거치면서 우리국민은 그야말로 황무지에서 오늘을
일구어 냈다.

나는 예전에 미국 뉴욕 5번가 록펠러센터에서 본 록펠러의 말이 생각난다.

"국가건 개인이건 절약과 근검이 경제행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경제의 4고 3저현상을 논하는 이가 있다.

이를 말하기 전에 기업가는 진정한 기업인의 자세로 제일에 최선을
다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과다한 차입경영으로 외형성장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자.

근로자는 생산성향상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근로자도 자기주장만 앞세우지 말고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정부는 실업문제에 적극 대응하여 실업자의 직업알선과 신산업기술의
재교육을 통해 노동인력의 전문화와 이를 재활용할 수 있는 전담기구도
구상할만하다.

정치는 국민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했는가?

경제를 이렇게 만든 우리 정치인도 각성해야 한다.

우리국민은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생업에 충실했는가?

값비싼 보석전시회에서 물건이 동나고 천만원이 넘는 모피코트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냉철히 국민 각자가 인식해야 한다.

가수요를 자제하고 불요불급한 해외여행은 삼가자.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참회의 심정으로 돌아가자.

이제는 그야말로 내실을 다져야 한다.

기업은 차별화된 제품,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경없는 세계경제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자.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국민의 저력은 무섭다.

오늘보다 더 어려운 역경도 우리는 이겨냈다.

우리 모두 심기일전의 자세로 새로 시작하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