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신의 편지는 뉴욕으로부터 였다.

강은자는 병원 창가에서 그 흘림체의 편지를 반갑게 뜯는다.

< 너의 근작 명시를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위대한 시인을 친구로 둔
자부심에 들떠서 이 팬레터를 쓰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친구! 나는 아무래도 큰 좌절을 겪을 것 같다.

나는 내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는 안타까운 입장이다.

다시 재혼을 할까 해.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야.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내가 되는 것이 야만스러운 남자와 원시적으로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바 아니지만, 그래야만 아버지께서 더 이상 걱정 안 하실것
같아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해. 세번째 결혼은 외관상 어느 정도
이상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진정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골퍼 쪽이야. 그러나 그 끝이
너무 들여다 보여서 피아니스트쪽을 선택하려고 해. 내가 정열을 바쳤고,
진정 사랑한 남자는 나보다 20년이나 나이가 어려 언제 또 불행을 겪을지
모르니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어. 이제 나도 늙었나봐. 미래가
걱정되니 말이다.

미래를 자꾸 걱정한다는 것은 역시 늙었다고 할 밖에. 어쨌든 육체의
나이가 중요하고 실질적이지. 그야말로 리얼리즘이 아닐까? ... >

그녀의 편지는 평범한 팬레터가 아니었다.

시를 쓰는 친구에게 자기의 비극과 운명을 속속들이 고백하는 담백하고
고백적인 긴 편지였다.

강은자는 자기만 그런 비극을 겪으며 살았다고 생각하다가 영신의
진실어린 편지를 받고 참으로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녀는 어디로 어떻게 보낼 계획도 없이 영신에게 긴 답장을 쓴다.

인생의 깊이와 회한을 담은 편지를 그녀는 하루종일 썼다.

장편 시처럼 아주 잘 된 답장을 쓴다.

< 기울어져가는 붉은 빛깔의 낙조를 보면서 너의 편지를 읽고 너의 고운
얼굴을 마주한듯 답장을 쓴다.

사랑하는 영신. 나는 네게는 비극이나 슬픔 같은 것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하며 살았단다.

그러나 너도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야 한다는 그 고백이 나에게는
무척 아프게 들린다.

장래에 어떻게 될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10년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 >

강은자 시인은 영신의 편지를 공박사에게도 보여주었다.

그들은 정말 아주 오래간만에 학교때의 순수한 우정을 되찾은 듯
진정으로 친구의 괴로움을 나누어 걱정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영신이 뉴욕의 백명우 연주 여행에서 돌아왔을때 지영웅은 마지막
프로시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신이 주선해주고 간 요리사가 어떻게나 지영웅의 영양관리를 잘
해주었던지 그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시합에 임하고 있었다.

"영신, 시합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 만날 수 없지? 나는 저번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틀림없이 프로를 거머쥘 거야. 정말 고마워. 그러나
나때문에 일부러 자꾸 여행하지는 말아요"

그녀는 세계 어디에 가 있든지 하루 한번 지영웅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어머니 같은 사랑과 누님 같은 보살핌과 연인으로서의 열정을 담아서.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