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달"인 지난 10월 한달동안에는 서울 국제음악제, 세계연극제,
광주비엔날레, 부산국제영화제 등 크고 작은 문화 행사가 많이 개최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문화의 날"로 지정된 10월20일
문화체육부에서 발표한 "문화 비전 2000"이다.

선진 각국에서는 유네스코에서 "문화의 세기"라고 규정지은 다가오는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인식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거국적으로 이에 대비한
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해 가고 있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도 "문화 비전 2000"을 선포하여 다음 세기를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중요하며 매우 고무적인 일로 생각된다.

20세기는 과학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물질문명 또한 고도로 발달돼 인간
생활에 많은 편리함을 제공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발달이 한편으론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시켰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수 없다.

20세기는 세계적으로 물질문명의 발전에 혈안이 되어 "문화 비전"이 거의
없었던 세기였다고 할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황폐화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제 늦게나마 이 사실을 깨닫고 다가오는 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맞이하려는
움직임은 너무도 당연하고 현명한 일이다.

20세기 음악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대중음악의 급속한 팽창이
전세계를 휩쓸어 클래식 음악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대상황에 걸맞고 정서적으로 건전한 양질의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도 할수 있다.

다만 여기서 생각할 것은 흔히 유행가로 통칭되는 대중음악은 말그대로
흘러가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종묘 제례악"이나 베토벤의 "제9교향곡"과 같이 인간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심성에 영원히 간직할수 있는 철학이 담긴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음악을 약으로 비유하자면 진통제나 마이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수
있다.

진통제나 마이신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면역이 생겨 약효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며 심한 후유증으로 인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듯이 유행가에 심취된
사람은 일시적인 향락이나 흥분에서 벗어 날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음악의 힘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수
있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폭력, 사회적으로 부도덕적인 행위의
발상지가 유독 대중음악의 홍수속에 파묻혀 있는 광란과 환락의 거리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음악계에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건전한 음악 예술을 진작시키기 위해 국가에서 막대한 투자를 하여 건설한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시적인 흥분제 역할을 하는 대중음악의
공연을 허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국민들
에게 그야말로 문화의 전당으로 인식되어 있다.

가뜩이나 건전한 클래식 음악이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이때,
이 두 문화의 전당마저 대중음악의 공연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면 과연
문화인들을 위한 공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심히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실제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지난해에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신파극의 공연을 허가한 사실이 있고, 또다시 그와 유사한 공연을 허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듣고 있다.

물론 예술의 전당 운영난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가장 민감하고 강력한 영향을 주는 텔레비전 방송조차도
저속하고 퇴폐적인 가사와 괴상하고 선정적인 의상과 몸짓으로 구성된 대중
음악 프로그램을 경쟁이라도 하듯 방영하여 건전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실정인데,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마저 대중
음악당으로 변신한다면 도대체 우리나라 문화정책과 문화비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8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