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1417~56)는 자가 중장이고 호가 단계다.

단계는 하위지가 태어나 자라난 경상북도 선산읍 영봉리(현재 완전리)앞을
흐르는 시내 이름인데 이 냇물은 김천에서부터 흘러오는 감천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하위지는 이곳 단계변 영봉리에서 형인 하강지와 아우인 하기지 하소지와
함께 태어나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며 공부에 열중하였던 듯하니, 그들이
독서하던 독서재가 "선산읍지" 누정조에 실려 있고 그 세주에 "영봉리에
있었으며 하위지가 지은 바 그 형제들과 문을 닫고 독서하였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위지 집안이 언제부터 이곳에 터잡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1940년에
출간된 "교남지" 권10 선산군지 인물조에서 하위지 부친인 하담의 세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양 인으로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사가 되었는데 본군에 와서
살다".

이로 보면 마치 하담이 선산군사로 왔다가 눌러 산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장을 여러 기록을 통해 추적해 보면 선산군사를 거친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하담은 태종 2년(1402) 임오 식년시에 을과 3인중 2등으로 문과에 급제
하는데 그의 부친 하지백과 조부 하윤은 벼슬이 없었던 듯하다.

하담이 태종 5년(1405) 5월 27일에 사헌부 감찰(정6품)이 되어 있었던
것을 "태종실록" 권9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태종 7년(1407) 2월 5일에는
영산감무로 나가 있다가 국경을 지키러 올라가는 밀양 시위군의 마필과
군기를 정밀하게 검열하지 않은 죄로 순금사옥에 갇혔던 사실도 실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후 하담은 세종 원년(1419) 11월 15일에 제주 판관(종5품)으로 나가
있으면서 왜선을 격파하고 포로가 된 제주도민을 구출해낸 공로로 공조정랑
(정5품)으로 승진하는데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주 상선 1척이 추자도에 왔다가 왜적에게 포위되자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갔는데 왜적이 무릇 5일동안이나 수색하여 7인을 사로잡았다. 제주도
안무사 정을현과 판관 하담이 불기운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모군 1백3명을
삼판선 17척에 태워 보내어 찾아 나서게 하였는데, 추자도에 이르니 적선
3척이 막 떠나려 하는지라

우리 배가 세길로 나누어 적선 2척을 뒤쫓아가서 협공함에 왜적이 많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왜적 3급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우리 대정 사람 3명을 얻어 돌아왔는데
적선 1척은 날이 저물어 뒤쫓아가 잡지 못하였다.

상왕(태종)이 명하여 을현을 가정대부(종2품)로 승급시키고 담은 공조정랑
을 제수하였다"

세종 6년(1424) 6월 5일에 하담은 경상도 주전별감으로 나가서 동전 10관을
만들어 바치는데, 다음 해인 세종 7년(1425) 1월 17일에 경상좌도 주전소
에서 불이 나서 주조한 돈과 구리및 하담의 의복과 마패가 모두 소실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해 9월 3일에 경상좌도 주전별감 김자양이
전임별감 하담이 만든 돈이 2천1백2관2백91문이고 이번에 만든 것이
3천2백24관2백87문으로 합계 5천3백26관5백78문이라고 아뢰는 것으로 보아
하담은 세종 7년 봄까지는 경상좌도 주전별감으로 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9년(1427) 정미 2월 6일에 세종은 지청송군사 하담과 양천현령 남양덕
이 임지로 떠나는 인사를 올리자 이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수령이 나가 백리를 다스리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런 뜻으로 친히 불러 보고 명하여 보낸다. 경상도 벼농사가 풍년인 듯하나
충실치 못하고 양천은 완전 실농이라 하니 내가 심히 걱정이다. 각각 그
마음을 다하여 내 지극한 뜻을 몸받도록 하라"

하담에 관한 실록 기사는 이것이 끝이다.

그러나 "청송부읍지" 환적에서 하담이 세종 9년 정미 2월에 부임해 와서
세종 11년(1429) 기유 6월까지 재임하였던 사실과 치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하담의 최후 벼슬이 지청송군사이고 뒷날 하위지가 부친을 일찍
여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하담은 지청송군사, 즉
청송군수를 지낸 직후에 세상을 떠났던 듯하다.

그런데 이해 4월 11일에 하담의 장자인 하강지가 기유식년시에서 동진사
23인중 1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있다.

하담의 집안에 길흉이 교차하는 해였던가 보다.

이때 하위지는 겨우 13세에 불과하였으니 선산 고향에서 아우 기지와
함께 독서에 골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로 보면 하담이 선산지군사로 왔다가 선산에 터잡아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선산으로 옮겨와 살면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었던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이런 환경의 급변이 하위지 형제로 하여금 더욱 공부에 열중하게 하였던
듯, 세종 20년(1438) 무오 식년시에 하위지는 을과 3인중 1등으로 장원급제
하고 하기지는 병과 7인중 1인으로 급제하여 형제가 동방으로 문과에 급제
하는 집안의 대경사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연벽이라 하여 더없는 가문의
경사로 여기는 것인데 하위지와 하기지 형제는 그런 경사를 집안에 안겨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위지는 장원급제까지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과거에서 성삼문은 정과 23인중 1인으로 급제하고 신숙주는 감시
진사 제1인으로 소과에 급제하고 있다.

하위지는 과거에 장원급제하면서 부터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그가 4월 11일 근정전에서 치러진 회시에서 내놓은
대책문이 시폐를 명쾌하게 지적하는 명문장으로 간쟁을 담당한 대간들의
무능을 신랄하게 질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시관으로 입시해 있던 영의정 황희와 판예조사 허조가 이 문장을
칭찬하고 장원으로 뽑아 놓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일제히 사직
하는 상소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청한 것이다.

사헌부 장령 강진덕 성봉조, 지평 민건, 사간원 우사간 임종선, 지사간
이맹상, 좌헌납 조자, 우헌납 배강, 우정언 윤사윤 등이 올린 사직소의
일단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요즈음 거생 하위지가 사리각 수리의 잘못을 말하면서 인하여 대간들이
오직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실책을 극구 풍자하였는데, 신등이 자신을
돌이켜 보건대 스스로 부끄러워 감히 더이상 직임을 더럽히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세종은 시관이 물은 말과 대책문을 들이라 하여 읽어보고 이렇게
말한다.

"대저 과거를 베풀어 대책을 시험하는 것은 그 바른 말을 구하고자 할
따름인데, 이제 위지의 책문은 바르게 기술하여 숨기지 않았으니 가히 취할
만하다.

또 그 논한 바는 간관의 과실을 일반적으로 논하였을 뿐이거늘 경들이 어찌
이것으로 혐의를 삼는가.

하물며 이 흥천사 불탑은 곧 조종이 창건하신 바로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어
무너지므로 내가 조종을 위해서 이 역사를 일으켰으니, 진실로 잘못된 일도
아니고 대간이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종은 이들을 이렇게 달래어 모두 직임에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사간원
에서는 다시 하위지를 장원으로 뽑은 영의정 황희를 탄핵하여 보복하고자
하여 이런 상소를 올린다.

"신 등이 일찍이 흥천사의 일로써 여러번 중지하기를 소문이나 말로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신 등이 충성스럽게 간하는 정성이 없었기 때문이니 진실로
죄책이 있으나, 영의정 황희는 지위가 수상에 있어서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데도 일찍이 한마디도 그것에 언급이 없다가 시험을 관장하는
날에 이르러서 거생의 대책을 보고 그것을 포상찬미하여 최상급제로 올려
놓았으니 불탑 중수의 잘못을 진실로 일찍이 몰랐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로 보면 그는 속으로는 그르다고 하면서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나라의 수상이 된 자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유사에 내리시어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이에 세종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꾸짖어 물리친다.

"내가 비록 불탑 중수를 명하였다만,거생이 바르게 기술한 말을 오히려
옳다고 여기거늘 하물며 시관이 되어 이 일을 물은 사람이겠느냐?

또 과거는 바르게 기술하는 말을 구하는 것이고 위지의 책문은 일반론일
뿐인데, 황희가 취해서 상렬에 놓지 않겠느냐.

영상에게 묻기를 청하지만 조금도 물을 뜻이 없다"

하위지가 이런 대책문을 쓰게 된 것은 시폐를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
하라는 시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해 2월 19일에 세종은 태조가 건립한 흥천사 5층목탑이 기울어져
무너지게 되자 이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는데, 승군 6백명을 투입하고 방패군
을 더해주며 승려로 자원 부역하는 자는 30일이 지나면 도첩을 주고 제
양식을 가져와 먹을 경우 15일이면 도첩을 주는 특전을 베풀어 3월 16일에
이를 완성해 낸다.

이 과정에서 과거 고려조에서 성행하던 반승(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여
먹이는 것)의 습속이 되살아나고 노상불사가 재현되어 승려들이 미륵세계가
이로부터 이루어지리라고 떠들고 다닐 지경이었다 한다.

이에 하위지는 이 흥천사탑 중수 사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대책문을
조리정연하게 기술해 나가면서 대간들이 충간의 직책을 다하지 않아 임금의
실정을 바로잡지 않았다고 꾸짖었던 것이다.

웬만한 임금같으면 우선 임금의 실정을 꾸짖는 이런 책문을 임금 자신이
용납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임금이 이를 용납한다 해도 수상이 장시관이
되어 그런 책문을 지은 사람을 장원으로 뽑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또 설혹 뽑았다 해도 문제가 생겼다면 임금이 나서서 그런 글을 뽑은
수상의 처사를 적극 비호하고 나설 수 있겠는가.

정녕 세종대왕같은 성군 아래서 황희와 허조같은 명재상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위지같은 곧은 인사가 나와서 당당하게 할 말을 다 하여 조그마한
비리도 바로잡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런 우리 역사 사실을 거울삼아 현실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가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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