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기반이 강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일시적인 것이며 공황이 올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지난 10월27일 뉴욕 주가가 사상최대로 폭락했던 날 클린턴 대통령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이어 그린스펀 연방준비은행 이사장도 비슷한 발언으로 금융시장의 불안을
씻기에 바빴다.

다음날 IBM은 주가안정을 위해 35억달러 규모의 자기회사 주식을 사들이
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이 회사 주식은 7달러나 올랐고 이에 힘입어 뉴욕 증시는 전날의
폭락세에서 벗어났다.

이날 여의도 증권시장에서는 주가지수가 사상최대폭인 35.1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느 누구도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립서비스"조차 내놓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나중에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공시하는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자사주를 매입하겠다는 회사는 수십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중에는 재정경제원의 요청에 의한 매입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한국과 미국의 경우를 견주어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과 미국의 관행은 한참이나 차이가 있다.

여차하면 대통령이 직접 나와 기자회견을 갖는 미국과 그렇지 않은 한국은
분명 다르다.

게다가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가 나와서 립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주가와
환율이 안정된다는 보장도 없다.

"대통령이 한마디하면 주가가 더 떨어지니 가만 있는게 낫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움과 의문은 남는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립서비스만으로도 주가를 회복시키는데 우리는
세차례나 안정대책을 내놔도 왜 효과가 없는 것인가.

미국 기업은 정부가 시키지도 않는데 왜 자발적으로 자사주식을
사들이는가.

돈이 남아서인가.

아니면 단지 주가를 높게 유지하려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은 이렇다.

미국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하는게 유리하기 때문에 주가가 떨어질때
자기주식을 사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도적으로 그런 유인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미국 투자자들은 자사주매입을 외면하는 한국기업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자기회사주식을 사는게 낫다는 이들의
충고는 "쇠귀에 경읽기"에 그칠 뿐이다.

요즘 경제부총리가 연기금관리를 맡고 있는 부처의 장관을 만나 주식
투자를 요청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불필요한 일이다.

부총리가 연기금의 자산운용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늘리고 싶으면 국정감사때 국회의원의 호통이
무서워 주식투자를 못하는 현실부터 고치고 볼 일이다.

한국증시의 폭락을 몰고 온 외국인들은 한국의 증시제도와 관행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한마디로 한국 증시는 투자자들이 마음놓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안돼
있다는 것이다.

증시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엉망이라는 얘기다.

지금이야말로 증시의 인프라를 개선하기위한 호기다.

폭락하는 주가를 일단 잡아놓았으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과거 증시안정책은 특융이나 기관 연기금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번엔 달라져야 한다.

자생력을 갖춘 증시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증시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증시 인프라중 가장 먼저 고쳐야 할 대목은 증시와 투자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증시를 한탕을 노리는 투자자들이나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문제다.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곳, 그것도 다른 금융기관보다 싼 코스트가
먹힌다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된다.

대통령 후보들부터 증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최근 미국의 한 조사기관은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곳이 바로 월
스트리트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만큼 증권시장을 신뢰하고 투자할만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증권시장을 국내에서 최고의 신뢰를 받는 곳으로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