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아주 우울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신은 언제나 자기네 별장에 가 있었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그의
강변빌라로 왔다.

그녀는 지영웅과 같이 살 수 없었다.

그것은 김치수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지내야 하는 외동딸로서의 사회적
체면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밤 열두시부터 새벽 여섯시까지는 같이 있었다.

그들은 부부같이 지냈지만 영신은 낮동안 아버지 회사에 나가 있었고
지영웅은 프로를 따기 위해 매일 골프장에서 살았다.

세미프로의 자격증만 가지고 있던 지영웅은 최근에야 피지에이를 땄고
그것도 하늘의별을 따는 것 처럼 어려운 경쟁을 뚫고 천신만고끝에 따낼 수
있었다.

이제 프로를 따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3천대1이 넘는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영신은 매일 최고로 맛있고 영양가 넘치는 음식을 해서 그에게 주지만
그는 상당히 피로해 했고 그가 시합을 한다든가 할 때는 영신은 며칠씩
아버지의 별장에서 오지 않았다.

그에게 스태미너의 축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영신의 극진한 후원이 필요했다.

"내가 프로를 따면 그 공은 영신 당신의 것이야"

지영웅은 요새 완전히 도인처럼 냉수마찰을 하면서 과거급제하는 자세로
골프고시를 위해 전력 투구하고 있다.

그는 거의 압구정동 골프연습장에도 못 나갔고 영신이 시키는대로
전문적인 프로골퍼에게 사사하며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고 있다.

"프로만 따면 세계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골프채를 한세트 선물할게요.

최고를 갖고 싶다고 했지요? 혼마 어때요?"

"아니, 지금 같아서는 그런 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떳떳이 살 수 있는가를 더 생각하고 있어. 내 소원은
지금 내가 당신과 항상 같이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야"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빙빙 돌린다.

그는 전보다 더 손아귀힘이 세어졌고 천하장사 같은 모습으로 새까맣게
탔다.

필드에만 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지금 푸른 초원과 희고 작은
둥근 골프공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의 골프에 미친것 같이 되어 있다.

새벽 여섯시에 뻐꾹시계가 울면 그들은 벌떡 일어나서 영신은 승마를
하러 나가고 지영웅은 골프채를 싣고 가까운 골프연습장으로 간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종일 만나지 못 한다.

재미없는 생활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상당히 행복했다.

그런 어느날 아버지 김치수 회장이 점심식사에 그녀를 대동하고 단골인
추영각으로 한정식을 하러 간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유명한 독신 피아니스트 백명우가 초대되어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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