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우리 사회에 팔불출이 하나 늘었다.

프랑스 TGV공장에 못가본 사람이 그들이다.

웬만큼 큰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이면 "TGV 초청(?)"으로 너도 나도
프랑스를 다녀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스갯 소리인 것은 사실이나 그 속에 뼈아픈 우리의 속사정이 있다.

노태우 정권에 의해 시작된 고속철사업은 이제 망국지철이 돼가고 있다.

1량에 2억달러 이상이나 나가는 기관차가 2량씩이나 이미 완성된 상태로
창고에 갇혀 고물로 변해가고 있다.

외환위기를 맞고 있는 형국에 4억달러 이상이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것이다.

"무모한 한국인들"이라는 국제적 망신은 이제 한두번 들은 얘기가 아니다.

재정이나마 우리 돈으로 추진한다면 또 모른다.

대부분 빌린 돈으로 하는 고속철사업은 97년 가격기준으로 20조원이
넘는다.

이는 현대자동차가 2년내내 만드는 자동차를 모두 팔아 한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할 만큼의 큰 돈이다.

그나마 고속철사업이 과연 완성될 수 있을지, 또 완성되고 나서 정말 믿고
탈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데 우리의 더 큰 속앓이가
있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중국의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 이른바 총알기차
라는 신칸센을 타게 됐다.

일본인들은 이 열차를 통해 일본의 기술력을 한번 자랑하고 싶은 속셈이
있었다.

일본 기자들이 덩샤오핑에게 신칸센을 타본 느낌을 물었다.

그때 덩의 대답이 걸작이다.

"손바닥 만한 나라에서 뭐가 바쁘다고..."

만만디 중국인 특유의 언론 회피용 지능발언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까.

땅덩어리가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섬으로 갇혀있는 일본과, 허리가 남북으로 잘려있는 한반도에 무슨 뚱딴지
같은 고속철이냐는 등의 핀잔이 귀속에서 울리는 것은 웬 일일까.

우리 지도층에서 덩같은 사람을 기대한다는 것은 과욕일지 모른다.

말레이시아에서 벌이고 있는 G프로젝트.

D회사가 추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서만 무려 2억달러의 손해가 발생
했다는 후문이다.

그나마 이 정도이기에 다행이었다는게 주변 사람들 추산이다.

거의 매일 지나가는 스콜(열대성 소나기)은 말레이시아의 상징이다.

이때는 모든 공사가 중단되어야 한다.

불행중 다행으로 올해는 스콜이 거의 없어 공사가 중단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이 때문에 더 크게 날뻔 했던 손해가 그나마 2억달러에 그치게
됐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같은 어려움이 이 회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해외에 나가있는 거의 모든 건설사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게 업계의 판단이다.

쪽박 깨지는 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당장 안고 있는 외채는 1천억달러가 넘는다.

최근의 대외 신용추락으로 추가 이자부담으로 작용하는 스프레드가 최고
3백bp, 즉 3%까지 올라간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산업은행이 해외에서 돈을 빌릴 때 해외 전주들은 한국정부가 빌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차입금리를 보통 금융기관들이 빌리는 것보다 좋게 빌릴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 금융위기로 산은이 발행한 장기채권의 스프레드가
얼마전 영국 런던 유통시장에서 290bp까지 치솟은 적이 있다.

국가신용으로 돈을 빌리는 산은이 이런 정도면 나머지 민간은행들은 더
말할 것 없다.

이로 인해 1천억달러가 넘는 외채에서 발생하는 추가 부담은 30억달러가
넘는다.

우리의 망신살은 이제 우주에까지 뻗혀있다.

무궁화위성이 별 용도없이 공회전을 계속하고 있는지는 이미 오래다.

국민의 세금이 아무 의미없이 우주공간에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공군이 자랑하는 F16기는 한대 값이 5천만달러이상 나간다.

최근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2대나 떨어졌으니 1억달러가 간단히 날아가
버린 셈이다.

그래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한보 기아 등이 무너지면서 해외에서 벌이던 프로젝트 또한 모두 우리의
부담이다.

한보가 필리핀에서 추진하던 댐건설 프로젝트에서만 간단히 2억달러이상이
날아갔다.

기아가 인도네시아에서 추진하던 국민차계획의 운명은 어떻게 돼가는
것일까.

최근의 동남아 통화위기로 금융기관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손해본 규모가
수 십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고 보면 우리의 보잘것 없는 쪽박은
"깨지고 있는 진행형이 아니라 이미 깨진 완료형"이라고 보는 것이 마음
편할지 모른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도 정치인들은 비전제시 보다는 밀실야합으로 일관하고
있다.

누구하나 어디서 달러가 새고 있는지 제대로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가가 총체적 직무유기상태에 빠졌다는 말이 어울리는 형국이다.

물 아껴 쓸 요량으로 수세식 변기에 벽돌을 집어 넣었다는 박정희
신드롬이 국민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 런던에서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