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이다.

둘레가 약 1천m로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아차산성이라고 하면 우선 고구려 평원왕 (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
장군이 한강유역의 실지를 되찾고자 출정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산성
아래서 전사했다는 역사적 설화를 떠올리게 된다.

제25대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는 어렸을 적에 너무 자주 울어
왕으로부터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놀림을 받고 자랐다.

온달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거리에서 구걸을
했다.

세인들은 그의 용모가 초췌하고 우스꽝스러워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공주가 장성하자 왕은 그녀를 명문귀족 집안에 출가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주는 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을 남편으로 맞겠다고
고집했다.

이에 노한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냈다.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혼인을 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런 남편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그에 힘입어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그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 나가 출중한
무예솜씨를 보여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면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동안 아차산성은 하남위례성 (지금의 광주)이 백제 건국기의
도읍이었을 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아차산성은 4세기말부터 6세기중반까지 삼국이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한강유역 일대에 속해 있었다.

한강유역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재위 413~490)의 남진정책에 의해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신라 제24대 진흥왕 (재위 540~576)때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아차산성은 그때마다 한강유역의 군사요충지가 되었다.

그 산성터에서 서울대조사단의 1차 발굴에 의해 명문이 새겨진 토기 등
고구려유물 1천여점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명문유물 출토가 처음인데다 남한에서 나온 최대
규모의 고구려 유물이라서 커다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