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동안 은자는 은연중 알콜중독에 걸려서 공박사의 클리닉에
드나들게 되었다.

속 상한다고 한잔, 외롭다고 한잔, 자기 시를 읽어줄 연인이 없다고
한잔, 거의 알콜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은자야, 정말 너 어떻게 하려고 이래?"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죽지 뭐. 무슨 큰 낙이 있겠어? 더 나쁜 꼴이나
안 보면 다행이지"

그녀는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박사는 재혼을 권했다.

"재혼? 그래, 한번 생각해보자"

일주일후에 은자 시인이 다시 왔을때 공박사는 눈두덩이에 퍼런 멍이 든
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녀석이 죽어도 나를 못 떨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재혼을
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콜라병을 던지더라. 그래서 이렇곰 됐구먼.
하하하하, 세상 오래 살면 뭘 해. 갈수록 삼천폰걸"

그녀는 웃었지만 그 얼굴에는 절망이 먹장구름처럼 끼여 있다.

공인수는 가슴이 아프다.

은자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의사로서가 아니고 진정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는 친구로서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하게 타이른다.

"술만 끊는다면 내가 네 인생을 옛날처럼 바꿔줄게. 제발 술 좀 끊자"

그러자 공인수의 눈물을 본 은자가 어려운 결심을 한다.

"네 남편에게 슈퍼를 맡기고 시골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갈까?
네 충고를 듣고 그 문제를 많이 생각해봤어.

그런데 문제는 네 남편이 우리 슈퍼를 관리해줄 수 있는가가 문제야.
그렇지 않으면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 문수를 잠시 귀국하게 하든가?"

은자는 아주 오랜만에 큰 결심을 하고 말했다.

콜라병이 날아올때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각성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문수가 귀국해서 슈퍼를 맡는 거다.

덕보를 내보내고 나서 다시 공부를 하러 가도 되고. 안 그렇냐?"

"그렇게 해볼게. 내 힘으로는 술을 끊을 수가 없어. 무슨 강제 수단이
필요해. 널려 있는게 술이니까"

그리하여 공박사의 사위인 문수는 대학원을 1년간 휴학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철학적이고도 서정성 풍부한 시를 쓰는 강은자 시인은 알콜
클리닉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덕보에게는 문수가 그동안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의 전별금을 주었는데,
그는 그 돈을 안 받고 도로 그 슈퍼에서 판매부장으로 일하겠다고 떼를
써서 그렇게 했다.

덕보는 원래 충직하고 착실한 사람이므로 언순이와 결혼해 살면서
열심히 일했다.

문수는 일년 쯤 한국에 머물면서 그 슈퍼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건물
임대료로 어머니가 생활할 수 있게 해놓고 돌아가려고 했다.

강은자 시인은 입원해 있는 동안 참으로 많은 시를 썼다.

인생의 쓴 맛을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그는 시인으로서
크게 크게 성장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