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가 해소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업부도는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3.4분기까지 16조1천33억원에 이른 어음부도액은
4.4분기중 다시 6조원가량 더늘어 연간 기준으로 22조원에 이를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시중의 자금사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주는 하나의 증거다.

주가가 폭락하고 원화의 대 달러환율이 폭등하는 등 증권.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기업의
돈가뭄현상은 정말 걱정스럽기만 하다.

올들어 한보에서 기아 해태에 이르기까지 부실기업 처리대상에 오른 그룹
또는 대기업은 10개에 달했다.

채권은행단의 협조융자에도 불구하고 해태그룹이 끝내 부도를 냈고,
뉴코아도 좌초위기를 맞고 있다.

앞으로 또 몇몇 대기업이 무너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돌고
그런 소문과 우려가 기업의 자금난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일부 재벌기업조차 연 30% 이상의 고금리로 사채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실정이라니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기업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금융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리고
있고, 특히 기아사태 이후 종금사들은 자체 자금난까지 겹쳐 극소수의
대기업그룹 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대출금을 갚으라고
독촉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초 개별기업의 부실 또는 부도로 금융시장이 경색되었으나 이제는
금융시장경색이 기업의 도산에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통화당국이 돈을 많이 풀어도 이 돈이 금융기관 사이에서만 거래될 뿐
기업쪽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

은행의 창구는 닫혀 있고 종금사 등의 단기자금 중개기능은 마비돼 기업의
돈가뭄현상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기업도 살고 은행도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기업이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이 몸만 사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은행은 전당포와 다를게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부실기업에 대출하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멀쩡한 기업이 돈줄이 막혀 쓰러지는건 막아야 한다.

과거 잘못된 대출때문에 어려워진 은행이 지금와서 무조건 대출을 꺼리는건
더큰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다.

사업성을 철저히 따져 대출을 과감히 실행해야 한다.

그게 공적 기능이 강한 은행의 책무다.

예컨대 종금사가 할인한 기업어음을 선별해서 매입만 해주더라도
기업자금은 의외로 쉽게 풀릴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건실한 기업에의 대출을 통해 돈흐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정부가 금융시스템 붕괴현상을 막을 분명한 의지를 보이고
시장원리 운운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음부터 없애야 한다.

종금사 등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정도의 믿음을 확고히
심어줘야 한다.

기업이 처분하고자 하는 자산매각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배려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분명 난국이고 난국에는 그에 걸맞는 대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