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개가 안평대군을 위해 "몽유도원도"에 제화시를 쓰던 어름인 세종 29년
(1447) 정묘 4월 27일에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던 이개의 셋째 숙부
이계전이 집현전을 떠나 동부승지가 되어 세종의 근신이 된다.

그런데 윤 4월 14일에 제주목사 이흥상이 영의정 황희를 비롯하여 정부
대신들과 도승지 황수신을 비롯한 승정원의 여러 승지들에게 토산물을
뇌물로 바친 사건이 드러나자 세종은 집현전 학사로 처음 승지가 되어 뇌물
상납의 고질적인 폐습에 아직 물들지 않은 이계전에게 특명을 내려 이를
바로잡을 방도를 세우도록 하라고 이른다.

이에 이계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뇌물에 얽힌 고사를 참고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이를 본보기로 들며 뇌물 근절책을 장계로 올리게 하니 사헌부에서는
5월 22일에 장문의 장계를 올려 그 근절책을 제시하고 세종은 이에 따라
뇌물수수자들을 엄벌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8월 18일에 세종은 그동안 길러낸 각 부서의 중견학사들을 대상으로 문과
중시를 치르게 하여 그 실력을 겨루어보게 하는데 영집현전사 겸 좌의정
하연 등이 근정전에서 이들을 시험한 결과 집현전 수찬 성삼문이 을과 1등
3인중 장원이고 수찬 이개가 을과 1등 3인중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의
명예를 빛낸다.

을과 2등에서도 집현전 부교리 신숙주, 교리 박팽년, 박사 유성원, 이극감
이 차례로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 최항, 홍문관 응교 이석형, 승문원 교리
송처관이 각부서에서 하나씩인데 비해 무려 4배라는 월등한 비율로 급제하여
역시 집현전을 빛낸다.

1등 3인중 2등을 이조 정랑 김담(1416~64)이 차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을과 1등과 2등에 급제한 10명의 학사들은 현직이야 어떻든지간에
모두 집현전에서 길러진 집현전 출신 학사들이었다.

9월에는 그동안 왕명을 받들어 편찬해 오고 있던 "동국정운" 6권 6책이
완성되어 신숙주가 서문을 짓는데 이에 의하면 집현전 직제학 최항,
직집현전 성삼문 박팽년, 집현전 응교 신숙주, 교리 이개, 이조정랑 강희안,
병조정랑 이현로 등이 이에 참여하였었다 한다.

이중 권1과 권6 두책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비장되어 있는데 국보 71호이다.

세종 30년(1448)은 이개가 32세 되는 해인데, 3월 13일 집현전 직제학
김문(?~1448)이 중풍으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간다.

유교의 기본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를 번역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시작하려던 참에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이에 집현전에서는 상주목사 김구(?~1462)가 김문을 대신할만 하다 하여
이를 불러올려 달라 하니 세종은 3월 28일 역마를 주어 김구를 상경케 하고
판종부시사의 직함을 주어 4서를 번역하게 한다.

집현전 교리이던 이개도 이 4서 번역작업에 참여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4월 3일에는 8세가 된 원손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는데 이를 경축하기
위해 세종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조정의 백관들은 진하전을 올려 하례를
드린다.

이 왕세손이 바로 뒷날 이개가 목숨을 바쳐 충성하려 했던 단종이다.

세종 32년(1450) 2월 17일 세종대왕이 영응대군저의 동별궁에서 54세로
돌아가고 문종이 2월 22일에 즉위하자 문종은 7월 6일 대폭의 인사개편을
단행하면서 동부승지 이계전을 도승지로 발탁하여 승정원을 맡기고 이개는
세자 시강원 문학(정 5품)을 삼아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게 한다.

그런데 이 인사행정에서 문종은 신미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긴 이름의 칭호를 올려 과거 태조 이전에
왕사를 대접하던 형식을 취하니 집현전 직제학(정3품.당하관)이 되어 문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박팽년이 7월 15일에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신미의 비행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대로한 문종은 다음날인 7월 16일에 박팽년의 고신을 빼앗고 엄하게
꾸짖는데 집현전 응교(정 4품)가 된 이개가 앞장서서 집현전의 동료들을
이끌고 박팽년의 무죄를 주장하며 함께 벌받기를 청한다.

그리고 7월 26일에는 이개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의 자격으로 어린
왕세자(당시 10세)가 사신을 접대하면서 언동에 혹시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서연관들이 왕세자 곁에서 임기응변하도록 하게 해달라고 하여 문종의
허락을 얻어낸다.

문종 2년(1452) 5월 14일에 문종이 불과 39세로 경복궁 강녕전에서
돌아가자 왕세자가 12세 어린 나이로 5월 18일에 근정문에서 즉위한다.

이에 국사의 처결은 문종의 고명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
좌찬성 정분, 좌참찬 허후가 담당하게 되었다.

드디어 12월 11일 김종서가 좌의정이 되고 정분이 우의정이 되자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이들 3정승이 국사를 처결하는 3두 정치체제가 되었다.

이에 대권탈취의 기회를 노리던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1453) 계유 10월
10일에 이들의 중심인물인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해질녘에 그 집으로
찾아가 유인해 내어 불의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힌 다음 그 밤으로 단종이
머물던 시어소를 장악하여 왕명으로 황보인 등을 불러다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이들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안평대군 부자를 그 밤으로
포박하여 강화도에 안치하고 8일뒤인 10월 18일에 안평대군을 사사한다.

이에 앞서 10월 15일에는 안평대군과 친교가 깊던 집현전 학사들을 대거
양사로 승진 이동시키니, 하위지와 성삼문을 사간원의 좌우사간으로 삼고
이개를 사헌부 집의(종 3품)로 보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명색은 승진이었으나 집현전 세력을 분산시키면서 안평대군을 죽이라는
상소를 저들 손으로 직접 써 올리게 하려는 수양일파의 악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평대군과 평생 그림자처럼 서로 따르며 살아온 성삼문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안평대군의 목숨을 끊으라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름을 빌려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그 때 성삼문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였으리라.

이개 역시 사헌부 집의로 이 일에 이름을 빼놓을 수 없었다.

수양의 측근에 빌붙어 일등공신으로 병조판서가 되어 있는 숙부 이계전에
대한 실망과 수치로 몸 둘 바를 몰랐었을 터인데 다시 이런 가증스런 일에
가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자괴감에 치를 떨었었겠는가.

그러나 어린 임금을 저들의 마수로부터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고 벼슬을 버리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10월 28일에는 귀양가서 아직 살아있는 우의정 정분, 좌참찬 허후,
충청감사 안완경 등을 처형하라는 상소에 다시 이름을 빌려 주어야 했다.

그러자 저들은 집현전 학사들을 회유해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11월 8일
에는 박팽년을 승정원 우승지, 성삼문을 수충정난공신 3등 좌사간 대부,
이개를 중훈대부(종 3품)로 승진시킨다.

이에 이개는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11월 10일 이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두번에 걸쳐서 완강하게 사양한다.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개는 다시 11월 21일 아예 사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한다.

그리고 11월 28일에는 정변중에 수양의 수족이 되어 왕을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한 공로로 봉군된 환관들의 군호를 삭제하라는 상소를 이개는
성삼문과 함께 당당하게 올린다.

저들의 방자한 반역행위에 대한 간접경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2월 1일에 다시 사직소를 올린다.

다음 단종 2년(1454) 1월 7일에는 경복궁 서북쪽에 세워진 내불당의 철거를
요청하는데 이때는 사헌부 장령으로 와 있던 유성원과 지평 이극감이 뜻을
함께 했다.

드디어 단종 3년(1455) 윤 6월 11일 수양대군이 어린 왕을 위협하여 대권을
탈취하자 이개는 성삼문 등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목숨걸고 도모하리라
결심하는데 세조는 이계전을 통해 이개의 충절을 눈치채고 이를 회유하고자
원년(1456) 2월 4일 인사행정에서 이개를 집현전 부제학(정3품.당상관)으로
승진 발령한다.

그리고 4월 15일 경회루 연회에서는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4서5경을
강하게 하고 부제학 이개에게 술을 따라 올리게 하는 특전을 베푼다.

그러나 이개는 상왕을 복위하려는 충성심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자신의
두 매부와 성삼문 박팽년 일가와 더불어 6월 1일 세조와 그 일당을 제거
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김질의 고변으로 6월 2일 일이 탄로나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는데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만큼 섬약한 체질이었으나 불로
지지는 참혹한 형벌을 가하여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까짓 것이 무슨
형벌이라고 할수 있겠느냐. 더 혹독하게 가하여라"라고 외쳐서 세조를
비롯한 참국인들의 기를 꺾어 놓았었다 한다.

이에 옛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참담한 자괴감에 실성한 세조가 가장 혹독
하게 고문을 가하여 옥골선풍 미남으로 타고났던 이개의 육신은 갈갈이
찢기어 저자거리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결한 충의지심은 5세기반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살아
있어 반역을 꿈꾸는 사악한 무리들을 끊임없이 질책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