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혼미한 만큼이나 경제의 앞날이 어둡다.

만나는 사람마다 경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그 원인을 돌린다.

물론 "시장경제원리대로"라는 주장에만 매달린 채 한보 기아사태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를 나 몰라라고 방치해 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부나 현 경제팀을 속죄양으로 삼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를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모두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경구로 인간이 문제를 직시하기가 얼마나 힘든 존재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한 사람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망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더라도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민족이 어떤 지경에
처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깨어 있는 국민이 나라의 문을 열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열중하던
시기에, 우리는 애써 바깥의 변화에 눈을 감았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국가를 빼앗기는 기나긴 고통으로 아직껏 그 상흔이 짙게
남아있다.

작은 나라는 경제력,이에 기초한 군사력과 외교력을 갖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구호가 현란하지만 상당기간동안 국민국가는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호전적인 북한과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대북한 우위를 지속적으로
넓혀가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의 증강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다.

외교와 국방, 이 모든 것들은 따지고 보면 돈 문제이다.

결국 경제력을 성장시키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지킬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단순히 누구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요인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근원적인 요인은 이미 우리의 고속성장기를 통해서 배태된 것이다.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80년대 민간주도 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부터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구호만 무성하고 그동안 크게 이루어진 것이 없다.

90년대 들어서 우리는 총체적 난국이란 이름으로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운좋게도 외부로부터 굴러들어온 행운 때문에 경제난의 실제모습이
가려진 적이 있다.

물론 문제의 본질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후에도 반도체 경기의 호황이 또한번 환상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우리는 현재처럼 낙후된 금융업을 갖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수 없다.

단순히 부실채권의 문제가 아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곳곳에 비효율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금융업이 견제와 감독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금융업의 낙후는 두자리 숫자나 되는 고금리로 연결되고 있다.

왜 이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계속해서 고금리 국가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결국 금융시장 개방에 대한 우려와 기득권 때문에 개방을 지연시켜왔던
사람들의 탁월한 선택의 결과라 할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정책입안자들은 현재의 체제로 운영의 묘를 살리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

뿐만아니라 생존권 보호의 명분 때문에 지나치게 규제된 노동시장 문제를
들지 않을수 없다.

규제된 노동시장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헌도보다 높은 임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게다가 고임금과 다양한 고용보호 장치들은 결국 젊은 사람들의 고실업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규제들은 정책으로 포장되어 정당화되고 있다.

경제적 자유가 심하게 침해받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혁신이나
개선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규제는 교육시장이나 의료시장에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소비자의 수요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공급자 위주의 교육체제 때문에
배출되는 사람들은 많은데 쓸만한 사람들은 적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금융 노동 행정 교육분야에서 만이라도 제대로 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람과 돈의 탈출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며,
경제의 어려움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변화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자기선택과 자기책임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원리를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번의 위기를 계기로 변화하는 세상을 직시하고 "세계는 한국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평범한 경고를 가슴속에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