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같이 향기로운 미소를 담뿍 띤 영신은 새로 산 듯한 비앰더블류
700시리즈 속으로 들어가면서 행복해서 죽을것 같은 표정으로 얘기한다.

"서로 전화 좀 하자. 꼭 해. 명함 줬지?"

그러나 공인수와 강은자 시인은 넘쳐나는 돈의 홍수속에 사는 영신이
어쩐지 멀게 느껴진다.

그녀가 아무리 참배 같이 싹싹하고 우아하고 우정이 넘치는 말을 해도
그녀가 갖고 있는 막강한 재벌 클라스에 돌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영신은 언제나 친구들에게 물과 기름처럼 떠도는 고고한
신분인지도 모른다.

그 장벽을 허물기는 공박사 같이 차가운 성품으로는 너무 아니꼬운
성채이고, 은자에게는 그녀의 고상함이 좁은 도랑이 아니고 폭이 넓은
강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강은자 시인은 영신이 준 명함을 곱게 간직한다.

며느리 혼수 끊을때 영신이 경영하는 나미주단에서 최대의 DC를 받고
싶어서다.

아무튼 여고 동창회날은 그런 저런 이유로 살림에 찌든 자신과 잔소리가
늘어가는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즐겁고도 한가로운 날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동창끼리 삼삼오오 떼를 지어 2차로 재즈바에도 가고,
연애하던 시절에 다니던 클래식 음악실에도 가고, 루치오달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연애하고 싶은 환상에도 젖고,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들으면서
그 곡의 애절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옛날에 헤어진 남자의 환영을 그리고,
자기의 허리와 히프의 사이즈는 잊고 아이들이 가는 디스코테크에
들어갔다가 "여기는 십대만 오는 곳입니다"라든가, "싸모님께서는 저기 길
건너에 있는 카바레에 가시죠"하고 퇴짜도 맞는다.

그녀들은 한심스러운 자기들의 나이를 슬퍼하면서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고 가자로 낙착을 본다.

아니면 대여섯이 동아리가 되어 왕년의 스타 가수 어니언스나 이치헌의
라이브를 듣기 위해 싸모님들을 내쫓지 않는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찾는다.

거기에서 혹시 데이트를 나온 아들이나 딸과 마주쳐도 상관없다.

여고 동창끼리라는 당당함에서다.

그러나 젊은 아이들은 이러한 아줌마들을 비웃는다.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저렇게 낄낄대며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싶을까?

여보쇼, 젊은이들.

그대들도 곧 40이 되고 50이 됩니다.

우리도 40이 넘어서까지 무엇하러 사느냐고 생각하는 사이에 이
나이가 되었다오.

선진국처럼 남녀노소 없이 아무 데서나 같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듭시다 그려.

어차피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은 운명적 조우이니 공부할 나이에 너무
흥청거리고 부모에게 돈 타내려고 기쓰지 말고 스스로도 피땀으로 벌어서
써보시게나.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