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오후시간에 오늘이 여고 동창회날인데 알고 있느냐고
강은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박사는 오랫동안 못 가본 동창회인지라 가겠다고 말한 후에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를 위해서 아무래도 중요한 정보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한마디 더 멘트를 넣는다.

"이따가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지만 잊기 전에 말하는데 아무래도
네 애인은 위험하다"

그녀는 뜸을 들인 후에, "왜냐구? 그 삼층에 있는 뉴올리언즈는 호모
아이들의 집결지 같으니까, 혹시 그 애 갑수가 양성 호모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너는 에이즈에 노출되는 것이니까, 차라리 내가 다른 수를
훈수하고 싶은데 어떠니?"

"좋아. 나도 그 애가 너무 이상한 짓만 해서 좀 싫었어. 꺼림칙 했어.
목숨걸 일은 없으니까 네가 훈수하는대로 할게"

"그러면 내가 그 덕대같은 청년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그 애를
만나서 너에게 인수시킬게. 그리고 그 애를 그 곳에 두면 너까지
위험하니까 아주 좋은 조건으로 너의 슈퍼마켓에서 쓰면 어떨까? 더구나
시골에서 갓 왔으니까 아직 그런 나쁜 습관에 길들지는 않았을 것 아냐?"

"맞다. 네가 하자는대로 할게"

은자는 무슨 큰 광맥이나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다.

"그럼 이따가 여섯시에 네 병원앞에 차대고 기다릴게. 나는 너 때문에
내 인생 전부가 행복해졌어. 너무 재단이 깨끗해. 그러면 너는 애인도
없이 어쩔 거니?"

"나는 옛날 그대로 살지 뭐. 아냐, 사실은 지금 좀 바빠. 나에게 딱지
맞은 적이 있는 어떤 제약회사 직원이 나에게 슬슬 다시 접근을 해서
연구중이야. 내가 찾는 다이아몬드가 없는 게 아냐. 좀 더 심사숙고하여
찾으니까 그렇지"

"잘 해봐. 나는 언제나 둘도 없는 네 친구니까"

"그래, 우리는 이제 서로 숨기는 것 없이 지내자. 특히 에이즈문제는
공통의 적이니까, 서로 숨김없이 털어놓자구"

그들은 전화를 끊으면서 친구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서로
외로운 것만큼 절절하게 느낀다.

여섯시를 손꼽고 기다리고 있는데 30분쯤 전에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박광석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 녀석은 뭘 하다가 30이 넘도록 아직 결혼도 못 하고 있는지,
올때마다 다음에는 청첩장을 들고 온다고 웃기는, 유머러스한 제약회사
엽업부 부장이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내주신다고 했는데, 그 말 믿어도 됩니까?"

사실 그는 그 날 선을 보러가야 하는데 만약 하늘같은 공박사가 시간을
내준다면 다른 날로 선보는 일을 미루려는 것이다.

서른여덟이 되도록 결혼을 안 하는 외아들의 농땡이에 진저리가 난
노모는 이제 우격다짐으로라도 장가를 보내려고 벼르고 있었다.

"몇시에 어디서 만나죠?"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