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근 < 은행감독원 금융지도국장 >

90년대 들어오면서 금융기관들은 시장개방에 대비하여 "무한경쟁시대"를
선언하고 나름대로 생존전략을 강구해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금융제도가 낙후성을 탈피하지 못한데다 불건전한
금융관행의 상존으로 금융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도면에서 볼 때 허술한 리스크관리체제에서 구태의연한 여신심사기법으로
여신의 편중현상을 막을 수 없었으며, 소위 제2금융권과 은행권간의 기능
분담을 위한 적절한 업무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늘날
거액 부실여신 발생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제도상의 미비점에 더하여 불공정하고 불건전한 금융관행은 금융
중개기능의 효율성을 저하시킴으로써 건실한 경영토대를 구축하는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해온 것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융개혁은 금융제도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하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불건전한 금융
관행을 개선하여 금융의 하부구조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 금융계에서는 속칭 "꺾기"라고 불리는 구속성예금이 대표적인
불건전 금융관행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구속성예금은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즉 금융기관 입장에서 볼 때 만성적으로 자금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태에서 자금수요를 맞추려면 부득이 자금을 조성할 필요성이 있는 데다
규제금리하에서 대출금리가 실세금리보다 낮게 묶여 있는 경우에는 대출금의
일부를 예금으로 꺾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또한 담보가 부족한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꺾기를 당하더라도 사채를
쓰기보다는 대출을 받는 것이 나은 실정이기 때문에 감독당국도 구속성
예금을 필요악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성예금은 금융정상화를 가로막는 일종의 "거품"이다.

차주기업이 대출받은 자금전액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예대금리차에
해당하는 금융비용을 부담하며, 자금난속에서도 매월 적금을 불입해야 하는
등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키고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반면에 금융기관은 "꺾기"라는 불공정행위를 통해 손쉽게 예금실적을 올릴
수 있으므로 국제화시대를 앞두고도 신상품개발과 서비스 개선으로 자생력을
높이려는 노력은 그만큼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금융의 거품을 제거하지 않고는 우리 금융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현실을 감안하여 은행감독원은 지난 8월18일을 기해 구속성예금을
전면 금지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내리고 추석절을 전후하여 3만4천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2조7천억원을 상회하는 엄청난 규모의 구속성예금을
정리한바 있다.

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구속성예금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실례를 전해왔다.

그 중소기업은 대출금 12억원에 계약고 11억원의 적금을 들고 있어 연간
대출이자 부담액 1억5천만원 이외에도 적금 불입액이 3억4천만원이나 되는데
이번에 예대상계를 하고 나면 연간 약 4억원의 자금여유가 생기게 되므로
더이상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금융의 거품이 얼마나 심각하였던가를 실감케 한다.

앞으로 개방화시대를 맞이하여 금융기관이 살 길은 이같은 거품을 걷어내는
한편 허울좋은 외형 위주의 경영전략을 버리고 내실있는 경영을 다지는
일이다.

이번 대기업 부도사태에서 보듯이 기업이 쓰러지면 은행도 쓰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이상 기업을 "꺾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제부터라도 중소기업을 도와주고 지원함으로써 우량고객을 확보하여
영업기반을 미리 미리 튼튼하게 구축해 나가는 은행만이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구속성예금이 은행에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켜 도산을 초래한다면 은행에는 엄청난 부실채권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금융 시대로 전환되어 가는 길목에서 금융기관
경영진은 발상을 일대 전환하여 고객인 기업과의 관계를 진취적으로 재정립
함으로써 다같이 사는 길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편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개혁 차원에서 관행의 개선에도 주력함으로써
은행과 기업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건전한 금융환경과 질서확립에 계속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