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직업, 미술은 취미"라고 말해온 가수 조영남(53)씨.

그가 본격적인 "화가 조영남"을 선언하고 나섰다.

가수 배우 MC등 만능연예인으로 활동해온 그는 90년 미국 LA 시몬슨갤러리
에서의 전시회를 통해 "화가"라는 명함 하나를 추가했다.

그후 93년 캐나다 토론토 데오도르미술관, 94년 미국 뉴욕 헤나켄트갤러리
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꾸준히 활동해 왔다.

지난 5월 화랑미술제, 8월 국제환경미술제에 참가했고 10월에도 2가지
기획전에 초대받았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독학으로 자기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것.

자유분방한 생활만큼 헐렁하고 편해 보이는 옷차림의 그를 보금자리겸
작업실로 쓰고 있는 청담동 빌라에서 만나 화가로 나선 동기, 활동계획,
인생관 등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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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박성완 < 문화부 기자 > ]

-최근 연예계 활동이 다소 뜸한 것 같군요.

"KBS "열린 음악회" 출연과 "체험 삶의 현장" MC 외에는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그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용중인 작업 공간이 좁아 미사리에 새로 작업실을 만들었습니다.

14일 곽훈스튜디오 오픈전을 가졌고, 18일부턴 환경조각 8인초대전을
갖습니다.

내년 2월 인사동 상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고, 3월엔 도쿄화랑제에 참가할
계획입니다"

-그림과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자화자찬 같지만 노래는 어려서부터 잘 했기 때문에 특별히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불렀죠.

오히려 언젠가 화가가 돼야겠다는 것이 저의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땐 미술반 반장도 했고.

대학시절 가수로 데뷔하여 열심히 노래만 부르다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재학중이던 김민기군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죠"

-취미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결심하신 계기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가수가 화가도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화가가 가수도 될 수도 있다는 열린
사고의 표본이 되길 바랐죠.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기도 했고.

사실 지난 90년 미국에서 전시회를 가질 때까지는 철저히 비밀로 했습니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할때 노래 외에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없다고
했어요.

가수가 그림을 그린다는게 왠지 티내는 것처럼 받아들여질까봐 걱정했던
거죠.

그러다가 우연히 한 큐레이터의 주선으로 로스앤젤레스 시몬슨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갖게 됐습니다"

-화투 바둑 바구니 태극기 등을 작품 소재로 많이 사용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 76년 여의도에서 열린 빌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돼 성가 가수로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7년동안 살면서 우리 것에 대한 향수가 생겼죠.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성경보다 삼국사기나 원효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난 5월 화랑미술제에 참가한 것과 관련, 기존 화단으로부터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땠나요.

"충분히 예견했던 일이라 담담했습니다.

"아마추어가 기성 화단의 물을 흐린다"는 그분들의 주장이 이해되기도
하구요.

어차피 미술을 계속하려면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기존 화단이 보수적이어도 궁극적으론 작품 수준이 문제겠죠"

-크게 영향을 받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성적인 면에선 아인슈타인, 감성적인 면에선 피카소가 신같은 존재
입니다.

둘다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산 인물이죠.

백남준씨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두세차례 만났는데 선지자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인간이 자기계발을 하면 저렇게 우아해질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셨는데 도중에 대중가수로 변신하게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당시엔 플라시도 도밍고나 파바로티처럼 대중적 활동을 하는 성악가들이
없었습니다.

길은 오페라가수나 대학교수가 되는 것뿐이었죠.

외모를 비롯해 여러면에서 승산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아 미 8군쇼단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직업
가수가 돼버린 거죠.

그러다 68년 "딜라일라"라는 번안 노래로 정식으로 가요계에 데뷔했죠.

그후 공공무대에서 풍자노래인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를 불렀다가
높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음날 군대에 가야 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겪었습니다"

-특별한 히트곡이 없으면서도 지금까지 대중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가수로 데뷔해 노래를 부를 때부터 히트곡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클래식 전공자, 고학력에 외국의 문물을 접했다는 점, 재혼과 이혼 등
독특한 캐릭터가 가수로서의 생명력을 이끌어 왔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광대 노릇"을 제대로
했다고나 할까요"

-최근에는 두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탤런트 이경진씨와의 결혼설이 나돌고
있는데..

"저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별로 매력적이지 못해요.

물론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겠지요.

결혼과 사랑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이경진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글쎄요.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자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요.

"큰아들 얼이와 둘째아들 늘이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큰아이는 학교 합창단 지휘자
이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알토 섹서폰을
연주해요.

큰 애는 얼마전 미국 ABC방송국 인턴으로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 초등학교 2학년생인 막내딸 은지(94년 입양)는 부산 동생집에서
학교에 다니구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당분간 그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그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생기면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죠.

얼마전 같이 노래도 부른적 있는 가수 존 덴버가 사고로 죽었어요.

저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음악 미술 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 보람있고 윤택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