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즐거운 휴가를 보내곤 했던 힐튼 호텔에 든다.

그러나 민박사는 정신빠진 사람처럼 멍청하니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의식한 듯 다정하게 웃으면서 다가온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못 만나서려니 애써
태연하려고 하면서도 공인수는 선득거리는 차가움과 타버린 정열의 재를
보는듯 하다.

그렇다.

그들의 사랑은 이미 재로 남은 거다.

"왜 그렇게 어리뜩거려요. 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음, 요새 좀 스트레스가 심했거든"

"환자 때문에요?"

"아니, 내 와이프 때문에"

"우리 사이를 아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모르겠지. 문제는 나에게 있어. 나는 요새 몹시 잘 안 되고 있어.
갱년기가 벌써 온 것은 아닐테구. 그래서 공박사 그대와라면 뭔가 잘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만났는데도 정신적 갈등은 여전하군"

"우리는 늘 여름에 만났는데, 이번에는 가을까지 끌어서 잘 안 되는가?
우리들 사랑도 이제 낙조의 계절인가? 아무튼 뭔가 석연치 않네요"

"나는 일년에 한번이라도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왔는데 역시
나는 병들었나봐"

그는 지금 간호사 미스 한에게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소모해서 아내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여기 오긴 했지만 역시 같이 왔어야 할 사람은 미스
한 이었다고 후회한다.

그는 그만큼 젊고 특이하게 남자를 사로잡는 육체적 구조를 타고난
미스 한 때문에 미스 한 신드롬에 빠져서 다른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될 때까지도 그는 동성 친구에게 처럼 키스를 했을 뿐 동침할
생각을 안 한다.

공박사는 너무도 급격스러운 그의 변심에 진정 당황한다.

"우리의 관계는 연애로 만난 것이니까, 연애감정이 식으면 그것으로
끝마쳐요"

"공박사, 미안하오. 사실은 이렇게 될 것이면 이번에 만나지 말걸
그랬어"

사실 그는 자기가 미스 한에게 이끌리는 유혹을 다스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미스 한 곁을 떠나 멀리 놓고보니 그녀야말로 그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여자였다.

더구나 그가 미스 한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녀의 특별한 육체적 구조
때문이었다.

그런 여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그로기시킬
것이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첫날밤 오랜만에 공박사를 안았을 때 그것을 느꼈다.

미스 한의 매력은 실로 메가톤급 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고 공박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지만 생전 처음 그는
남자로서의 구실을 끝내지 못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