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린 <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

최근의 기아사태를 보면서 우리경제에 질서와 법칙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번에 정부 경제팀이 보여준 정책은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것일수 있다는데 주목하지
않을수 없다.

우선 이번 기아사태의 특성은 빚을 진 자가 국민경제를 볼모로 빚을 준
자와 정부를 꼼짝못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정부의 힘을 배경으로 기업들이 은행빚을 제돈처럼 갖다 쓴 적은
많았으나 정부와 금융권 모두가 이번같이 피협박대상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데는 기아가 소위 국민기업으로 지목되어 기아
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
하려 한데 있었다.

기아가 과연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국민기업인지에 대해선 의구심
이 있다.

국민기업이란 소위 소유와 경영의 분리만 가지고는 아니되고 그 경영의 잘
잘못에 대해 국민 또는 주주들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경영진과 노조가 한 기업을 파산지경에 이르게 해
놓았지만 누구도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최근에 들어와 모든 경제의 운영을
가능하면 시장기능에 맡기고 정부는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장
하던 사람들과 언론들이 정부가 무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정부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결국 자기의 뼈와 살을 깎고 협력업체들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경영정상화의 전망이 전혀 없는 기업에 국민의 혈세를 수혈해 주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필자는 이번 기아사태에 직면하여 정부 경제팀이 취한 태도는 일부 의심
받을 짓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기조는 옳다고 본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민간부문의 경제활동 결과에 대해서 정부는 간섭을 하지
않고 국민의 세금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아사태의 해결도 가능하면 정부는 빠지고 채권단과 기아간의
협상에 맡긴다는 것이다.

다만 기아사태로 인해 파생된 금융불안과 같은 근본적 문제에는 간접적으로
개입하여 기아사태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기아사태와 직전의 한보사태는 역설적으로 앞으로 우리경제의 운영
방향에 대해 바람직한 역할을 한 측면이 있다.

우선 금융권이 앞으로는 정부가 압력을 넣는다고 해서 채산성이 없는
기업에 무턱대고 돈을 빌려 주진 않을 것이고, 이것은 금융자율화를 진전
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운영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것으로, 정부는 앞으로 민간
부문의 자원배분을 가능하면 시장의 자율기능에 맡기고 간섭을 최소화한다는
정책기조를 정립한 것이나, 정부가 해야할 일은 불공정거래나 독과점거래와
같은 비경쟁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자유시장경쟁체제의 기반을 조성하면서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분야에 적절하게 개입하여 시장경제가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경제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쓰러진다고 중소기업에 돈을 풀고, 농업이 힘들다고 농민에게
돈을 풀고, 사양산업이 망한다고 사양산업에 돈을 풀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이 경쟁력을 가질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나 언론이 깨달아야 할 것은 이러한 전환기에는 어느 정도의
혼란이 발생하고 피해를 보는 부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책이 장기적으로 바람직스럽고, 우리 경제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할 경우엔 단기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서 당장 경제가
망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고 정부정책에 신뢰를 보낼 필요가 있다.

물론 정부가 사심없이 그러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아직 너무나 많다.

자유시장경제의 기반조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무조건 손을 놓아버리면 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수 없어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불필요한 규제를 하루 빨리 철폐해야 한다.

최근의 담합비리사건과 관련한 공무원들의 뇌물수수사건에서도 보듯이
최근들어와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오히려 늘어난 것같다.

이것은 정권말기적 공직기강의 해이에도 연유하지만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규제에서 발생한다.

기업의 투자와 구조조정및 자구노력을 저해하는 여러가지 규제와 세제상의
제약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투명하지 않은 경제는 비생산적인 부문에 자금이 몰리게 함으로써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금융실명제의 보완은 반드시 자금세탁방지법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탈세를 방지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세행정의 개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더불어 정치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지금 대선을 앞두고 국회의원들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겠지만 현재 국회에
넘겨져 있는 금융개혁관련법안,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세법개정안 같은 제도
개선은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대선 후에라도 임시국회를 열어 다음 정권이 출범하기전에 반드시
입법화가 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