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수 박사는 오늘 너무나 기분이 좋다.

아주 오랜만에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 민박사로 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하와이로 놀러 올 수 없어?"

"한국에 다녀가신다더니 계획이 바뀌었어요?"

"하와이가 우리에게 황폐한 마음을 더 잘 달래주는 곳이기 때문이야"

그건 그랬다.

어디로 누구와 무엇을 하러 가든지 그곳은 아무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

공박사는 근래에 스스로 무척 지쳐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친구들을 따라 술을 한잔 걸치고 요상한 단란주점에도 갔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짜증과 피로가 몰려와서 암담하고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이 모두 허망하고 낙이 없다.

희망을 걸고 있는 미아도 짜증만 낸다.

밥도 안 먹고 공부도 열심히 안 한다.

그녀는 그런 여러 히스테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민박사의 제의는 진정 고마웠다.

"언제가 좋겠어요? 스케줄을 만들어보세요. 요새 나도 한계점에 도달해
있어요"

그녀는 동료 의사인 그에게 고백한다.

"자살하는 사람을 이해할 만큼 심각해요"

"미안해, 도무지 와이프가 놓아주어야지. 이번에도 같이 하와이로
가기를 희망하는 거야. 한국에 간다고 하고 호놀룰루로 가려고"

"됐어요.

죄를 짓는 것은 나니까 스케줄을 만들어서 전화를 하세요.

그러면 나도 거기에 맞추어볼 거니까.

민박사만 믿다가 허기져서 바람을 피울뻔 했어요"

그들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는다.

너무도 신나는 순간이다.

이때 어디서 술에 잔뜩 취한 미아가 진료실로 들어선다.

"엄마, 나 진찰을 좀 받아야 될 것 같아서 왔어요"

"무슨 소리야? 학원에 가 있어야 할 시간 아냐?"

"애인이 도망을 갔어요"

"너 정말 이럴래?"

"나는 그 남자를 잊을 수가 없는걸. 내일 지구가 폭발한대도 나는
그 남자에게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었어. 그런데 그 남자는 이사를
가버렸어. 내가 보기 싫어서야"

미아는 눈알까지 취했다.

횡설수설이다.

"엄마, 내가 그렇게 못 났수?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

"얘, 누구나 첫사랑의 열병은 한번씩 앓는 거라고. 하지만 넌 좀 심한것
같다"

"그게 도대체 누군데 우리 미아를 이렇게 슬프게 할까? 얼마나 잘 난
놈인데 너같이 아름답고 천진한 미인을 싫다고 해? 그 놈은 장님인가보다"

"맞지? 엄마, 그 남자가 그른 거지? 내가 아니지? 나는 정말 청순한
미인이지? 현명하고 괜찮은 처녀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