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대치해 있는 우리에겐 독일 통일의 경험과 의미는 항상 남다르다.

때맞춰 창립20주년을 맞는 한독경상학회가 1일 신라호텔에서 "세계경제질서
의 변화와 한국과 독일의 대응"이라는 주제아래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은
특별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자리에서는 <>통일후 북한의 토지소유권처리방안 <>통일독일의 농업
정책과 그 시사점 <>시장의 세계화 관점에서 본 독일통일의 경험등 다채로운
주제가 다루어졌다.

심포지엄의 주요내용을 정리 요약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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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의 세계화와 독일 통일경험 ]]]

W. 굼펠 < 뮌헨대 교수 >

베르린장벽의 붕괴는 이념분쟁의 종식의 상징이다.

독일은 올해로 통독 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동서독간의 격차를 줄이고 이질감을 극복하는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에는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독일통일에 대한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처음에 생각했던것 보다는 매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정치지도자들이 사회주의하의 구동독 경제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과대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콜총리는 동독을 통일후 5년 이내에 젖과 꿀이 흐르는 번영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전후 에르하르트가 라인강의 기적을 만든 것같이 이러한 발전전략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가 과소평가한 사실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유산을 경시했다는 사실이다.

구동독은 그간 너무나도 많은 경제적 본질을 소모해 가며 운영돼 왔다.

국가무역이 독점되어 세계시장에서 분업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일이후에 세계화의 과정에서 비용이 저렴한 지역으로의 생산기지 이동이
이루어지자 구동독 기업은 낮은 경쟁력 때문에 세계화 전략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세계화였다.

지금까지의 체제전환은 주로법제도의 전환과 재정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서독의 법체제를 동독에 적용하는 것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자원낭비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1조마르크의 재정지원이 이루어졌다.

주로 소비적인 목적으로 투입되었으나 많은 부분 사회간접자본 건설에도
투입됐다.

구동독이 남겨준 과거의 부담인 국가부채는 3천6백억에 달하고 있다.

연방정부 대책과 재정이전은 외견상으로 경제상황이 개선된 것 같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높아 사회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한다.

조세경감 조치에 따라 구동독에 건설붐을 이루었던 대도시들은 발전을 했다.

가시적인 성과가 있음에도 구동독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그럼에도 비현실적인 임금이 채택됐다.

구동독 기업의 제품은 수출시장 판매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동독 기업제품은 생산디자인 광고 서비스면에서도 경쟁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구동독제품이 판매되지 않는 한 경제적 호황은 어렵다.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동독 기업은 세계경제 체제로 전환 진입
하는데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서방국가들이 구동독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증가된 반면
구사회주의 국가의 몫은 크게 낮아졌다.

이것은 정부의 보조금 지원책에 기인한다.

이에는 특정한 수출지원책과 신용보증제도인 헤르메스에 기인한다.

정부의 육성책은 구서독 기업들이 구동독으로 생산시설을 이전시킬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구동독 기업은 세계화시장에서 소외되어 왔지만 외자도입과 외국인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산업입지는 낮은 노동생산성에 기인해 매력적이지 못하지만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 이루어질 경우 매력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

구동독 재건을 위해 투입되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여전히
인플레율이 낮다.

이것은 독일통일이 갖는 하나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장기적으로 보아 구동독은 산업입지로서 매력적일수 있다.

외국인 투자증가 기반위에서 사회적문제 해결과 연방예산 경감 그리고
세계경제로의 편입이 이루어짐으로써 스스로 강화되어 가는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는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