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회에서 결정이 이루어지는 기본 단위는 개인이다.

그래서 개인들이 빠르게 합의를 이루기는 무척 어렵다.

자연히 모든 조직들에서 결정은 거의 언제나 한 개인이 내린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또렷한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다.

"동료들 가운데 으뜸(primus inter pares)"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집단적 결정을 내세우는 조직들에서도 그런 경제의 논리는 작용한다.

그래서 지도자를 뽑는 일은 어느 조직에서나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를 뽑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선출이 그리도 긴 과정과 정교한 절차를 거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정치지도자의 유고시에 그의 직책을 이어받을 후계자들에 관해서 자세하고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런 승계의 규칙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 정치적 혼란이 나온다.

현실엔 그런 권력승계 절차가 적용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적용되기 어려운
회색 지대가 있다.

정치 지도자가 병이나 다른 사유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지만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겨야 할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경우다.

그런 경우에 권력은 공식적 후계자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의
측근이 쥐게 된다.

전형적인 예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임기 말년이다.

그는 1919년 10월에 혈전증에 걸려 좌반신을 쓰지 못했고, 1921년 3월
물러날 때까지, 실질적으로 대통령 노릇을 한 것은 그의 아내 이디스 윌슨이
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의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세력과 협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의 비타협적 태도로 그 조약은 끝내 비준되지 못했고 미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나 온 세계 사람들에게나 큰 불행이었다.

만일 이디스 윌슨이 병에 걸린 대통령의 비현실적 고집을 누그러뜨리는
지혜를 가졌었다면, 이 세상의 역사는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그 조약이 비준되었다면, 세계적 정치조직은 국제 연합보다 삼십년 일찍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병에 걸린 정치 지도자의 권력이 측근에게로 넘어간 경우들 가운데 근년에
잘 알려진 예로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가 병으로 일을 보지 못했을 때,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다스린 것은
후계자인 총리가 아니라 옐친의 딸이었다.

정치 지도자가 병으로 나랏 일을 보지 못할 때만 가족들의 영향이 큰 것은
아니다.

정치 지도자는 실제로는 권력을 가족들과 나누어 갖는다.

가족들이 권력을 탐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권력이 워낙 무거운 짐이라 정치 지도자는 그것을 나누어 질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은 어려울 때 궁극적으로 가족들에게 의지한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아주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마지막으로 상의한 사람이
어린 장남이었다는 일화는 퍽 시사적이다.

그런 사정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개선할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회색 지대가 본래 정의하거나 또렷한 규칙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들인
데다가, 이 경우엔 필요한 정보의 부재가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재임중 암에 걸린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
지도자의 건강에 관한 정보는 어느 정권이나 가장 열심히 지키는 비밀이다.

가장 실질적인 대책은 정치 지도자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들 가운데 알려져
야 할 것들을 시민들이 쉽게 얻도록 하는 조치다.

그래야 시민들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우고 감시할 수 있다.

사생활에 관련된 것들을 빼놓으면, 정치 지도자의 가족들에 관한 정보들은
공적자료들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그것은 선거에 나선 후보들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얘기다.

후보의 자격과 정책에 대한 정보들은 시민들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후보를 고르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해야 할 자료인 후보 가족들에
대한 정보들을 일반 사람들이 얻기는 무척 어렵다.

이회창씨의 경우처럼, 추문이 나와야, 비로소 알려지는 실정이다.

지금 우리 대중 매체들이 후보 가족들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사생활의 보호라는 미덕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다음 정권에서 대통령과 매일 권력을
나누어 가질 사람들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이 후보를 평가하는 것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선, 유력한 후보들이 나이가 많으므로, 그런 정보는
특히 큰 뜻을 지닌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나이 많은 사람이 대통령이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큰 위험을 안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렇게 정치 지도자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공적 정보의 영역에
놓는 것은 가족이 지닌 영향력이 잘못 쓰일 위험을 줄인다.

정치 지도자 가족들의 사회활동은 어느 것도 사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된다면, 대통령의 조언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쉽게 그런 위험에
대해 언급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차남의 활동을 사생활로 여겨서 다른 사람들이 언급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고, 그런 얘기를 한 사람들이 큰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정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