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그날밤 백옥자는 작은 영치의 오피스텔에서 잤고, 술에 취해서
꼼짝도 못하고 새벽녘에야 깨어났다.

붉은 머리맡전등빛 아래 골아떨어진 영치가 가엾은 얼굴로 쌕쌕 자고
있다.

그녀는 그때서야 이 애가 바로 자기와 같은 성인 백씨이고 이름은
영치라고 기억해낸다.

아무리 봐도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예쁜 총각이다.

지영웅보다 더 조각같이 다듬어진 미남자가 콜콜 자고 있다.

그녀는 목이 몹시 타서 냉장고가 어디 있는가 살폈으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없는지 옷걸이와 벽거울만 보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인기척을 낸다.

그래도 영치는 일어나지 못 하고 잠에 빠져 있다.

그 녀석이 인정스럽기는 했지만 우선 이렇게 초라한 집에 왜 자기를
데리고 왔으며 물은 어떻게 마셔야하는지 난감하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그를 깨우기가 안 되어서 였다.

인정이 많은 그녀는 비록 이 아이가 별 것 없는 거리의 부랑아지만 결코
괴롭히거나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의 그러한 착함이 지영웅에게 언제나 따뜻한 인정으로 느껴져왔던
것이다.

그때서야 영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더니 금세 어디서 났는지 물을 한컵
들이댄다.

"백사장님, 물을 찾으셨지요?"

"어떻게 알았냐?"

"너무 취해서 나중에는 말도 못 하고 주무셨으니까요.

그래서 물을 한컵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구나"

"아이구 누님, 고맙기는요.

이렇게 누추한데 오셔서 죄송해유. 그래도 저는 호텔 그런데 가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유. 사장님은 참 예뻐유. 주무시는 얼굴이 천사같았어예"

그 녀석은 그녀의 허리를 애교있게 끌어안는다.

그때서야 백옥자는 소사장의 말이 떠오르며 정말 마음씨가 곱고 순진한
녀석을 소개했다고 감격한다.

"우리는 동성동본이 아닐까?"

"아이 아줌마도, 무슨 그런 말씀하세유. 친동생같이 잘 돌봐주세유.
그리고 사실 저는 이렇게 떠도는 것보다 어디 마땅한 직장 있으면
취직하고 싶어유. 술집 같은데 있어 봐야 더 타락하는 것밖에 뭘 배울
것이 있간디요"

"그도 그렇구나"

그녀는 곱슬곱슬한 영치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주면서 이 아이와
자는 것은 너무 가엾다고 생뚱한 생각을 한다.

"몇살이라고 했지?"

"스무살이유. 누나는 이제 서른 갓 넘었지유?"

"글쎄"

그러면서 그녀는 지영웅을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성적충동을
느낀다.

이 청년은 자기의 동생도 누구도 아닌 거리의 청년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