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요. 우리는 인간문화재라고 불러요"

인기드라마 ''용의 눈물''의 김재형(61) PD를 인터뷰하기 위해 KBS 본관
연기자연습실을 들어서자 방원의 장인 민제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송재호씨가 묻지도 않았는데 한마디 툭 던지며 자리를 비켜 준다.

우리 역사와 사극에 대한 애정, 드라마 연출에 대한 열정이 과히 국보급
이기 때문이란다.

송씨가 한 말의 의미를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한시간 반동안 취재노트 4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쏟아내 놨다.

행간에는 그의 역사 사랑이 진하게 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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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조성근 < 국제1부 기자 > ]

-36년 PD생활 중 31년동안 사극만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극을 고집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PD가 된 뒤 한 5년간은 현대물을 찍었습니다.

왕, 달동네, 영희의 일기 등이 제가 만든 작품이죠.

하지만 밥상 주변에서 이뤄지는 일상 드라마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대신 역사가 가진 진실이 나를 매료시켰지요.

사극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 자긍심을 일깨워 주고 싶었습니다"

-방송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저는 제 스스로를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독교 방송에서 성우생활을 했어요.

대학시절(동국대 국문학과)에는 KBS 성우로 활동했죠.

TV 연출은 62년부터 했습니다.

지난해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연봉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방송계를 통틀어 저 뿐입니다"

-사극을 하다 보면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보람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 주십시오.

"가장 힘든 점은 촬영장소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민속촌 행주산성 등 손에 꼽을 정도지요.

또 일부 민속마을은 개인소유라 잘 개방하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사극발전이 어렵죠.

방송국이나 영화진흥공사에서 대형 야외스튜디오를 세워야 해요.

정부지원도 필요하고요.

위성방송 시대가 개막되면서 전파가 국경을 넘나들고 있어요.

우리 것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절실합니다.

특히 보람있었던 일은 용의 눈물을 하면서 사극은 중년들만 본다는 고정
관념을 깬 것입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이 드라마를 즐겨보고 있어요"

-나쁘게 묘사되고 있는 인물의 후손들로부터 항의도 많이 받을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거의 협박에 가깝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철저하게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해 드라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연출자 입장에서 조선왕조실록이 객관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
입니다"

-요즘 용의 눈물이 인기가 있는데 이 드라마를 기획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그동안 많은 사극을 만들었습니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한차례씩은 다 다뤘죠.

하지만 왕들을 절대권력자로만 해석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해석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거죠.

또 조선왕조사를 순서대로 정립해 보고 싶었습니다"

-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해서 한차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저나 카메라맨이 미리 발견했다면 절대 찍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말에 새겨진 글자 중 D자는 실제 D자모양이 아닙니다.

발굽모양이죠.

정치인들은 정말 해도 너무 합니다.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봐주십시오"

-드라마 제목에 대해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이 많습니다.

용은 뭐고 눈물은 무엇입니까.

"왕을 절대권력자로만 표현한 기존 사극과는 달리 나는 이 드라마에서
왕을 인간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왕들은 신료나 백성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을 때는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용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네 임금을 말합니다.

눈물은 희로애락의 눈물이지요"

-그렇다면 각 임금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조는 칼로써 조선을 세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대에 아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요.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태조가 흘린 눈물은 골육상쟁을 지켜 보면서 흘린 피눈물입니다.

그밖에 위화도 회군 때 흘린 사나이의 눈물, 조선창건 때 흘린 성취의
눈물도 있습니다.

정종은 골육상쟁 끝에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옥좌에 올랐습니다.

옥좌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습니다.

늘 방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정종의 눈물은 불안의 눈물입니다.

태종은 비록 조선왕조를 튼튼히 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그도 인간임엔
틀림없습니다.

골육상쟁, 토사구팽 과정을 통해 방원의 가슴에 흐른 눈물은 말 그대로
피눈물입니다"

-의상이 기존 사극과 사뭇 다르더군요.

고증은 어떻게 하셨나요.

"기존 사극은 주로 조선 후기를 다뤘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배경은 고려말, 조선 초기입니다.

고려복장이 시청자 눈에 생소해 보이는 것입니다.

용의 눈물은 고증에 큰 획을 그은 드라마라고 자부합니다.

한평생 의상만 연구한 이화여대 유희경 명예교수가 의상고증을 하는 등
고증에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인기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작가의 극작에 대한 테크닉이 뛰어나요.

반짝 스타를 배제한 캐스팅도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출연자들은 연극경험이 있는 탄탄한 실력을 가진 분들이죠.

물론 요즘 정치현실도 작용했겠죠"

-용의 눈물은 언제 끝납니까.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게 되나요.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내년 3월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민씨 동생들의 처참한 죽음, 이숙번의 토사구팽, 세종 등극, 6진 개척,
집현전 설치, 한글발명 등을 그릴 생각입니다.

특히 조선의 르네상스기인 세종시대를 제대로 조명해 민족 자긍심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십니까.

"감독의 길엔 정년퇴직이란 없어요.

전문직인데다 인생경험과 노하우가 절대로 필요하니까요.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할 생각입니다.

소망이 있다면 촬영현장에서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시청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용의 눈물은 인간드라마입니다.

또 정치드라마가 아니라 교양역사 드라마입니다.

현실정치와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