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자 < 진성산업 품질관리부 한우리분임조 >

한 집안의 며느리, 부인, 또한 두 아이의 엄마로서 집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아이들도 어느정도 성장하여 여가 선용 및 가계의 경제적 도움을 위해
"어디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직장생활이 이젠 내 생활의
거의 전부가 된 채 7년이라는 세월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처음 직장 생활을 하고자 할때 시부모님께서는 "여자와 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며느리가 직장생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남편은 "집안에서 살림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냐" "뭐가 부족해서 직장을
다니려고 하느냐"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주부 사원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마음먹은 것이고 좋게 생각하면 한량없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한 나는 근교의 회사를 알아보게 되었고 그 결과 집에서 가까운 평택
진성산업에 이력서를 내게 되었고 힘들게 입사하게 되어 처음으로 배치받은
부서는 품질관리부서였다.

그리고 입사한지 며칠뒤 남편이 우려했던 상황이 나의 앞에 펼쳐졌다.

다름아닌 신입사원 환영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일찍 들어가겠다고 집에 약속을 한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런 힘든 일들이 집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차근차근 관련 규격을 찾아가며 검사를 다 했는데 라인에 들어가서
문제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검사 항목중 하나를 깜박잊고 누락시켰던 것이다.

나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몰랐다.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한후 QC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 나는 어느정도 검사 업무에 눈을 뜨게 되었다.

94년5월 인내하고 노력하는 나의 앞에 또다른 배움의 기회가 찾아 왔다.

회사에서 한국표준협회를 통하여 QC7가지 기초수법에 대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가 품질관리업무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제조업 분임조장 과정"이라는 통신교육을 6개월간
수강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게 되었다.

나는 최고의 점수를 받아 표준협회로부터 성적우수자로 상을 받았다.

사장님 또한 품질 향상을 통한 최고의 품질을 고객에게 지속적으로 공급
한다는 취지로 5S운동과 1백PPM 품질혁신운동을 적극 추진토록 독려하였으며
우수 분임조에 대해서는 매월 시상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형적 정돈 및 색별 정돈을 통한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활동을
전원이 펼친 결과 덕분에 정돈의 달에 우수분임조로 포상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런 5S활동이 집에서 늘 하는 일과의 한 부분인 듯 싶었고 다르다면
체계적이고 짜임새가 없다는 것뿐이지 일상적인 생활인지라 직장에서 하는
순서대로 집에서도 해보았다.

먼저 이제나 입을까, 저제나 입을까 모아두고 쌓아 두었던 옷보따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깝기는 아까웠고 미련스럽기로 따지면 미련퉁이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젠 부엌살림의 정리가 시작되었고 이 구석 저 구석 단계별로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갖다보니 주변이 말끔해져 보이고 좁았던 집구석도 넓어 보였다.

이런 활동을 펼치고 있는동안 사무국에서 96 경기도 분임조 경진대회가
있다는 공고가 붙었고, 한우리 분임조가 선정되었다.

우리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고, 그날 이후 우리 분임조는 분임조발표
대회준비 및 연습을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면 오후 10시가 넘는 때도 많았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던 나였지만 어느 정도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던 남편이 역정을 내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헤아린듯 부서장님께서 "주부사원도 할수 있다는 당찬
모습을 보여 주셔야조. 용기를 갖으세요"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발표날.

우리는 "리모컨 구조 개선으로 불량률 감소"라는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하였다.

잘 해보겠다는 마음은 앞섰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발표이기 때문에
눈 앞이 캄캄했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마쳤다.

다음날 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최우수상, 진성산업주식회사 한우리 분입조"라는 사회자의 말이 들리자
우리는 "와" 하는 함성을 질렀고 초조와 긴장으로 가득찼던 나의 마음은
복받쳐 흐르는 눈물로 앞을 가렸다.

이는 기쁨의 눈물이요, 성취감의 눈물이요, 어려웠던 지난 시간들의 눈물
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들은 전국 대회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강행했고, 그러다 보니 귀가시간도 자연히 늦어졌다.

이제는 시어머니께서도 "그렇게도 그 일이 재미있니" "먹을 건 먹고들
하는 거냐"며 걱정도 해주신다.

우리들의 발표차례가 왔다.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들의 활동사례 발표는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연습을 많이 한지라 발표는 막힘없이 무난히 마쳤다.

심사발표를 앞두고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 분임조는 은상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모든 순간들이 머리속을 스쳤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겪었던 역경과 여러가지 일들이 떠올랐고 두눈에서
아쉬움의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하여 분임조 발표대회에 대한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큰 수확을 얻기위해 일년 내내 땀흘려 노력하는 농부처럼 나의 한해도
무척이나 바쁜 생활이었다.

강력하게 반대해 왔던 남편은 "곰도 재주를 부릴 줄 아네"라며 그동안
협조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품질명장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동안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방황
했던 순간 순간들이 이제는 기쁨의 눈물되어 내 뺨위로 흘러 내렸다.

한낱 주부사원도 이런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QC활동을 통하여 얻은 진정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시댁과 친정식구들도 함께 기뻐해 주었고 격려해 주었다.

96년 11월 "품질의 달"은 내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날들로 자리잡은 달
이었다.

못내 아쉬웠던 분임조 경진대회의 은상 수상과 품질명장이라는 대업의
성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되도록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느라 때로는 가정주부라는 것조차 망각하고
지내 왔던 시간들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나의 곁에 함께해 준 남편은 행사장을 가득메운 산업인과 이들속에 우뚝선
아내의 자랑스런 모습에 감탄했다며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으며 축하한다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주부사원으로써 이런 자리에 선 기분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나는 오늘과 같은 기회는 여러번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새삼 주부 사원에서 떳떳한 산업일꾼으로 품질 혁신의지를 다시한번
되새기며, 그동안 소홀했던 가정일에도 보다 더 관심을 갖고 보살피리라
마음먹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