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끊내자 마자 이내 전화가 걸려온다.

핸드폰이었다.

지영웅은 잠깐 그 목소리를 확인하다가 스위치를 눌러 버린다.

그는 지금 다른 사람과 어떤 대화도 하기 싫다.

그 목소리는 백옥자 여사의 애끊는 음성이었다.

그는 모든 전화를 끊은 후 욕실로 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또 씻는다.

이제 나는 한 여자의 낭군이다.

적금을 붓기 위해 몸을 팔고 웃음을 팔고 자존심도 파는 거리의 부랑아가
아니다.

그는 붕붕 떠오르는 꿈을 꾸면서 깊은 잠속에 빠진다.

백옥자 사장은 도저히 지영웅과 통화할 수 없게 되자 소대가리
소사장에게 매달린다.

"지코치는 요새 무슨 큰 복권이 터졌는지 나에게도 연락이 통 없습니다"

그들은 오래간만에 소사장의 단란주점에서 만났고 백옥자 여사가
30만원을 소사장에게 미리 건네준다.

이 단란주점은 소사장 마누라가 미남 청년을 두고 경영하는 좀 요상한
곳이다.

"꼭 지코치를 만나고 싶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으면 지코치를 안 만나도
돼요.

그러나 틀림없고 얌전하고 후탈이 없는 아이로 소개해주세요"

단식원에서 몸을 빼고 나온 백옥자는 전보다 훨씬 의욕이 넘친다.

"그놈이 아마 거물을 물었나봐요.

골프장에 늘 있는데 프로를 딴다고 정신이 없더라구요"

"참 좋은 남자에요.

그런 남자를 놓친 나는 정말 재수없는 여자구요"

"그 놈은 힘은 장사인데 너무 제멋대로 였지요.

초조해 마십시오. 더 젊고 더 멋진 아이를 소개할게요"

"더 젊어도 싫어요.

30쯤이면 돼요.

너무 어리면 동생같아서. 호호호"

그녀는 수줍음을 타면서 소사장을 바라본다.

몹시 농염한 시선이다.

그녀는 어느날 이 단란주점에 친구들과 왔다가 소사장과 연결이 이루어
졌었다.

"교통사고가 백옥자 여사를 영 재수없게 한 겁니다.

그 친구 백여사가 자기를 버렸다고 얼마나 울고 불고 하면서 나에게
하소연하며 백여사를 찾아달라고 졸랐는지 아십니까?"

그는 미쳐셔 날뛰던 지코치의 측은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백옥자 여사를
위로한다.

"내 재산을 다 바쳐도 좋으니까,나는 지코치를 다시 찾고 싶어요.

그러나 영 싹수가 안 보이면 단념해야지요"

그녀는 이제 매운 각오로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결심하고 나왔다.

남편이 죽은 후 10년간이나 수절하다가 처음 만난 남자가 지코치였다.

그녀는 이러한 세상도 있는가, 여기가 천국인가 지옥인가하며 정신없이
3개월을 지코치와 사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지코치와 재혼까지 생각했었던 그런 관계였다.

정말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었다.

약간 불량하긴 해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굉장한 사내였다.

그러나 그녀는 교통사고로 모든 것을 잃었다.

송두리째.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