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1년(1439) 7월께 박중림은 모친상을 당한듯 하다.

그래서 좌사간 박중림은 벼슬을 버리고 시묘를 살기 위해 고향인 전의로
내려간다.

이에 박팽년도 9월 27일에 사직장을 올려 벼슬을 내놓고 전의로 내려가
시묘 사는 부모를 모시면서 틈나는대로 독서를 하며 지내겠다는 뜻을 세종께
아뢴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음 해인 세종 22년(1440) 7월에
박팽년으로 하여금 전의로 근친하러 가는 것을 허락하여 수십일동안 전의에
머물면서 인년) 기년 대년 등 아우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주고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사실은 "박선생유고"에 실린 "아우들에게 주는 시의 머릿글
(증사제시서)"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박팽년이 7월에 내려간 것을 보면 그 조모의 소상 제사가 아마
7월이었던듯 하다.

조부가 생존하였으므로 소상으로 대상을 삼아 이 해에 탈상하였을
터이니 박팽년도 그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말미를 받아 전의로 갔다고
보아야겠다.

이 해 3월 15일에는 이숙번이 고향 안산으로 돌아와 살다가 68세로
돌아가고 7월에는 박호문의 김종서(1383~1453) 무고사건이 표면화되어 결국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8년동안 여진정벌을 단행하며 북변 확장정책을
담당하고 있던 김종서가 그 자리를 내놓고 서울로 올라오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래서 김종서는 12월 4일에 형조판서를 제수받아 상경하는데 이날
안평대군의 장인인 송곡 정연(1389~1444)은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세종 23년(1441)은 박팽년이 25세 되던 해인데 이 해 3월 17일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오십여명의 문무 시종신들을 거느리고
온수현으로 온천목욕을 떠난다.

세종의 다리병과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세종은 바퀴를 중앙에 하나 단 초여를 만들어 타고가면서 여기에
기리고라는 자동 거리측정기를 장치하고 갔다 한다.

차가 1리를 지나면 나무로 만든 인형이 저절로 북을 쳐서 이를 알리는
장치였다.

이번 온천에서 세종의 병환이 상당한 효험을 보았으므로 4월 17일에는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키게 된다.

온양이란 이름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 온수현 행행에 박팽년을 비롯한 집현전의 연소학자들이 시종하는 것은
물론 세종 측근의 형조판서 김종서와 병조판서 정연 등도 호종하게 되니
유도대장으로 서울에 남는 병조참판 신인손(1384~1445)이 병조판서 정연과
이별하면서 이별시 한수를 지어 바친다.

그러자 좌참찬 하연(1376~1453)을 비롯한 호종 제신들이 그 운을 빌려
화답하는 시를 짓게 되니 큰 규모의 시권이 되었다.

이에 정연의 조카로 안평대군과 지기상합하던 정효강이 박팽년에게
그 시권의 서문을 지어주도록 부탁한다.

이에 이제 불과 25세밖에 안된 청년학사 박팽년은 당대의 명경거유들이
지은 시권의 서문을 당당한 명문장으로 엮어내니 "정판서를 보내는 시의
머릿글"이 그것이다.

그 일부만 옮겨보겠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남이 예로부터 어렵다 하는데 현인 군자가 재주와
도를 품었다면 누구인들 왕정에서 드날려 해와 달의 빛(임금의 덕)에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운수가 맞지 않으면 아랫자리에서 끝나는 사람도 있고 한갓
아랫자리에서 끝날 뿐만 아니라 도와 때가 어그러지면 산림에 묻히는
사람도 그 얼마인지 모른다.

옛날 맹자는 제 선왕을 설궁에서 뵙고 놀면서 쉬라는 말로 대답하였으나
빈말로 실리어 끝내 길에서 늙었고, 양웅은 한 성제를 감천궁에서 시종하며
"감천궁부"를 지음에 문장이 빛나고 신령스러웠으나 지위는 창을 잡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을 뿐이다.

이제 공은 공훈이 있는 집안의 자제로 넓고 큰 국량을 가져 일찍이 성상이
큰 그릇으로 여기었으며 왕실과 혼인을 맺어 영화가 이미 극에 이르렀다.

(중략)

임금과 신하가 서로 기뻐하고 혜택이 드디어 하층민에게까지 미치니
시종한 신하들은 서로 시를 지어 그것을 축하하였다.

예전의 현인들의 얻지 못했던 임금을 얻을 수 있어서 예전의 현인들이
실행하지 못했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설궁의 대답과 감천궁의
부와 비교해 본다면 어찌 하늘과 땅 뿐이라 하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남이 이렇게 지극하였으니 이는 가히 노래할만
하다 하겠다.

그러나 공이 시를 좋아하는 독실함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많기에 이르겠는가.

대체로 시를 좋아하는 일은 항상 떠돌아다니거나 시골에 묻혀 사는
곤궁한 선비들에게서 나오고 대인 군자가 청운을 밟고 올라 기세가 가득
차고 뜻을 얻게 되면 미칠 겨를이 없게 된다.

이제 공은 일찍이 풍운을 만나 지위가 병조의 우두머리로 손에 병권을
장악하고 삼군을 호령하니 의당 시 읊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이에 능히
시권을 손에서 놓지않아 시 잘 짓는 명성이 조정을 진동하니 사람들이 시
읊기를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위의 돌아보심은 날마다 더욱 융성해지고 아래의 촉망도
날마다 더욱 높아져서 묘당(의정부의 별칭)위에 앉아서(정승이 되어)임금과
주고받는 노래 지을 날 의당 있으리니 더욱 힘쓰십시오"

짧은 글이지만 글을 짓게 되는 경위와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그 자격과
능력에 대한 축하와 기대를 충분히 표현하여 글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과 만족을 만끽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해 7월 23일에 왕세자빈 안동 권씨가 왕세손을 출산하고 다음 날인
24일에 산후통으로 돌아가는 경사와 불행이 왕실에 찾아온다.

이때 탄생한 왕세손이 뒷날의 단종이니 박팽년 부자가 이 아기를
보호하려다 16년 뒤에 능지처참되리라는 사실을 귀신인들 알 수 있었겠는가.

세종은 너무 기뻐서 대사령을 내려 이를 경축하였었다.

그 날로 도승지 조서강 등이 경하를 드리고 영의정 황희는 집현전 부제학
이상의 대신 중신들과 함께 진하하고 7월 30일에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경하하는 전문을 올린다.

박팽년 부자는 공식적인 경하 대열에서 진하하기도 하였겠지만 왕세자의
사부로서, 또 왕세자의 도반으로 사적인 축하가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박팽년의 실력을 세종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9월 29일에는 호조참판 이선과 집현전 부수찬 박팽년 및 저작랑
이개 등에게 명하여 당 명황, 즉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실을 기록하는 형태의 책을 엮어 후인들이 거울삼아
경계하는 자료가 되도록 하라고 이른다.

사실 기록은 선유들의 논평과 관련 고금시도 망라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그림은 당시 화원 화가로 안평대군의 지우를 받고 있던 안견에게
그리게 하고, 사실기록은 박팽년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이 맡고 나서서
이를 완성해내니 세종은 이 책의 이름을 "명황계감"이라 지어주며
박팽년으로 하여금 그 서문을 짓게 한다.

이에 박팽년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동원하여 빈틈없는 명문장으로 그 서문을
완성해낸다.

그래서 이 "명황계감서"는 대부분의 박팽년 시문들이 인멸되는 중에도
살아남아서 성종때 서거정이 편찬하기 시작하는 "동문선" 권93에 수록되어
있다.

9월 21일 원손의 모후인 현덕빈 안동 권씨를 고안산 와리산에 장사지내고
25일에는 왕세자빈 간택을 위해 가례색을 설치하고 10월 19일에 처녀 30명을
사정전에 모아놓고 14명을 친히 가려 뽑은 다음 26일에 다시 14명중에
재간택을 하고 12월 7일에 역시 사정전에서 3간택하여 판서운관사 문민과
예빈직장 권격의 따님을 취한다.

그 사이 11월 2일에는 박중림을 좌사간 대부로 복직시키고 11월 14일에는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옮기며 원손의 외조부인 권전(?~1441)을 판한성부사로
임명하는데 권전은 따님을 앞세운 충격 때문이었던지 다음 달인 윤 11월
18일에 병사하고 만다.

사실 세종은 왕세자빈이 젊은 나이로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이즈음부터 인생무상을 절감하게 되어 차츰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흥천사 사리각에서 경찬법회를 크게 열어 세자빈의 영가를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10월 25일 성녕대군의 처당숙인 성달생을 불러 경찬법회에 쓸 물건을
의논하고 그 공급을 책임지도록 한다.

그러면서 유신들의 거센 반발을 예상하여 김종서를 주무부서인 예조의
수장으로 발령하고 박중림을 사간원 좌사간으로 복직시켜 그 반발에
완충작용을 하도록 하였다.

박중림은 세자의 사부이니 세자빈을 위한 경찬법회를 진심으로 반대할 리
없는데다 박팽년이 집현전의 젊은층들 여론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삼사의 맹렬한 반대상소가 있었지만
김종서와 박중림이 이들의 주장을 대변하듯 앞장서면서 무마하였기에
흥천사 사리각에서 베풀어지는 사리경찬법회는 다음 해인 세종24년(1442)
임술 3월 24일부터 5일동안 성대하게 베풀어질 수 있었다.

세종은 이 경찬법회가 치러지기 직전인 3월 3일에 왕비와 함께 강원도
이천온천으로 온천목욕을 떠났다가 5월 1일에야 환궁한다.

이 온천행의 총지휘는 안평대군의 장인이자 병조판서인 정연에게
맡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