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깡쇠가 나른한 몸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오피스텔로 돌아왔을때
정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권옥경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지코치, 나 술 한잔 사줘요"

마침 영신과 배부르게 병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라 지코치는 한잔의 술이 나쁘지는 않다고 쾌히 승락한다.

일억원이 넘는 차를 선사하고도 권옥경은 지금 참으로 우스운 입장이
되어 버렸다.

화류계 남자들의 순정은 이런 것인가? 권옥경은 지금 정말 씁쓸하다.

전번에 미아와 같이 들어갔던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서니 낭만적인
흑인재즈가 흘러 나온다.

이 여자는 침대의 순간을 좋아했고 영신은 탱고나 삼바 마카레나 같은
낭만넘치는 춤을 좋아한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권옥경에게 너그러운 미소를 띄운다.

"자기 왜 자꾸 나를 못잊어하지?"

정말 아무 가식도 없이 지영웅이 단도직입으로 그렇게 말한다.

"바로 그 정직한 매너가 그립고 또 당신의 복제 남자는 없었어"

"더 찾아봐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자 권옥경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역시 옛날의 임시아내였던
여자처럼 솔직하게 나온다.

"자기가 나를 피하니까 나는 죽고 싶어졌어. 물론 다른 남자를 찾아봤어,
그러나 없어. 자기같이 진솔하고 섹스를 잘해서 나를 꽉꽉 기죽이는 그런
남자가 없어"

"그럼 옥경씨에게 필요한 것은 뭐지?"

그는 판사처럼 엄격하게 묻는다.

물론 그는 권옥경에게만은 너무나 부드러운 말투다.

그녀는 한때 그의 여왕이었으니까.

지금도 만약 그녀의 신세를 잊고 있다면 그는 짐승같은 놈이다.

그러나 그것은 깡패세계의 의리이고 결코 감정적으로는 영신을 배신할수
없다.

물론 옥경을 다시 따뜻하게 안아줄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영신에게 미안하다.

그렇게 이중 삼중의 교제를 할수 있었던 때는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던때의
짐승같은 지깡쇠의 춘추전국시대였지 지금은 아니다.

그는 천사와 같은 영신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애인이지요?
사랑하는 지아비가 아니고?"

권옥경은 아버지앞에 앉아 있는 천진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결코 거기 더이상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어린소녀처럼 애원한다.

내게는 애인이 필요하다고, 그는 크게 웃고 나서 백영치의 전화번호를
적어 준다.

그의 수첩에는 아직도 크리스마스파티를 할때의 남자들 명단이 있었다.

지코치가 물개 박사장에게 소개해주었던 스무살짜리 백영치의 전화번호와
이름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