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0년(1438) 무오년은 박팽년이 22세 되던 해인데 이해 2월19일에는
성삼문의 조부인 판중추원사 성달생과 이순몽을 제조로 삼아 흥천사 사리각
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기 시작하여 3월16일에 완공한다.

4월17일의 무오 식년시에는 생원 하위지가 을과 3인중 일등으로 장원하는데
하위지의 아우인 하기지가 병과 7인중에 합격하고 성삼문도 정과 23인중에
합격한다.

왕실에서는 4월21일에 제7왕자 평원대군 임이 홍이용의 따님을 맞아들이는
경사가 있었다.

5월10일에는 우승지 권채(1399~1438)가 불과 40세로 요절하는데 사촌 형인
지재 권제(1387~1445)와 함께 문형을 담당하여 "향약집성방", "통감훈의"
등의 찬집에 참여하였었다.

박팽년이 웅문거필로 꼽은 당대 문학지사중의 하나였다.

6월17일에는 "시자수집"의 편찬이 끝나 직집현전 유의손이 서문을 짓는데
세종이 우리나라 시법이 미비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여러 책에서 산견되는 시법을 널리 모으게 하여 찬집한 것이었다.

세종이 시호를 관장하는 봉상시 판사 허후로 하여금 최종 교정하게 한 다음
주자소에 명하여 금속활자로 인쇄해 내게 하였다 하니 이 책의 찬집에도
박팽년은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11월7일에는 집현전 관원 20인을 경연과 서연에 나누어 구임시키도록 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

이로써 박팽년 부자는 각각 경연관과 서연관을 나누어 맡게 되니 아마
박팽년이 서연관으로 왕세자의 글동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 이때부터였을
듯하다.

성삼문도 안평대군의 죽마고우로 이해에 집현전에 들어오게 되므로 박팽년
과 지기를 서로 허락하게 되는 것도 이해부터였으리라.

이달 14일에는 야인을 정벌하여 북변을 확장하는 일을 6년 동안 전담해 온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김종서가 박호문의 참소 사실을 알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11월30일에는 당송 팔대가중 대표적인 문장가인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을
주석하는 일을 끝내어 집현전 응교 남수문(1408~1443)에게 발문을 짓도록
하고 주자소에 명하여 금속활자로 이를 인쇄하여 반포하게 한다.

발문에 의하면 지난 여름에 세종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김빈,
박사 이영서(?~1450), 성균사예 조수 등에게 명하여 그 주석을 달아 찬집
하게 하였다 한다.

이 일에도 연소 집현전 학사군에 속해 있던 박팽년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세종은 1,2차 왕자난에 있어서 태종에 대한 실록 기록이 항상 불안하여
그것을 여러번 보려고 하였으나 전례가 될까 보아 차마 보지 못하다가 끝내
이해 12월7일에는 당시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숙번(1373~1440)을
불러 올려 그 내용을 자세히 묻는 것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별도의 기록을
남겨두려 한다.

그래서 태종에게 죄를 짓고 경상도 함양에 귀양가 있는 이숙번에게 말을
주어 상경하도록 하니 12월12일에 이숙번이 함양으로부터 서울에 올라왔다.

세종은 이숙번에게 쌀 10석, 옷한벌과 술과 고기를 하사하는데 이는
이숙번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을 듯하다.

세종이 직접 묻기가 곤란하였던지 도승지 김돈으로 하여금 궁궐안의 조용
하고 따뜻한 처소에서 음식 공궤를 잘 하면서 얼마가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당시 상황을 물어 기록하였다가 자신에게 보이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김돈은 선공감의 온돌방에서 사옹원이 공궤하는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으며 당시 상황을 이숙번으로부터 듣고 기록하여 세종에게 보여주게
되나 이때 이숙번이 구술했던 기록은 현재 남겨져 있지 않다.

무슨 까닭인지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그 기록들을 삭제하여 세종의
의도를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어떻든 세종은 이숙번에게서 만족할만한 구술을 얻어낸 듯 이숙번이
태종의 죄인이기는 하나 죄보다 공이 더 크니 서울 밖에서 마음대로 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양사에서 들고 일어나 이를 반대하는데 사간원 좌사간(종 3품)으로
있던 박중림도 12월20일에 이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한다.

세종21년(1439)은 박팽년이 23세, 박중림이 40세 되던 해이다.

이 해는 정월부터 왕실에 경사가 있게 되니 1월8일에 소의 김씨가 막내
서왕자인 담양군 거(1439~?)를 출산한다.

세종의 나이는 이미 43세나 되었다.

이에 세종은 소의 김씨(정2품)가 내자시 비녀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지만
장차 빈(정1품)으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고 1월27일 우선 귀인(종1품)으로
봉하게 한다.

보다 앞서 세종은 도승지 김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소의는 본래 내자시의 종(비)이었다.

무술년(1418) 내가 처음 즉위하자 모후께서 중궁안으로 뽑아들이셨는데
그때 나이 13세였다.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대비와 왕비)을 모시는데 오직
삼가니 그런 까닭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 아들을 기르게 하였다.

만약 삼가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자를 기르게 하였겠는가.

소의는 6남2녀를 낳았는데 딸은 모두 죽고 아들은 모두 살아있다.

점쟁이들의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모두 이르기를 여섯 아들들이
모두 오래 살리라 한다.

내가 정궁에게서 아들이 많으니 소의의 아들을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그러나 여섯 아들들을 낳아 모두 장수한다 하니 사람이 하려고 해서 미칠
바가 아니고 실로 하늘이 시켜서 그리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소의의
명이 귀하다 할 뿐이로다.

고금에 있어서 궁인의 세계는 본래 귀천이 없어서 노래하는 아이로 입궁
하는 사람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제 소의의 세계가 비록 천하나 나이 겨우 열세살에 입궁하여 일신의
부덕이 이미 바르니 그 양가의 딸로 세계가 비록 귀하다 하나 부녀 행실을
잃은 자와 비교하여 본다면 같은 날에 놓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올려서 빈을 삼고 싶은데 혹 귀인은 어떠하겠는가"

김돈과 우의정 신개가 모두 귀인으로 우선 승격하고 차차 빈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날 세종은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장차 신빈으로 승격되는 소의 김씨는 안평대군이 탄생하던 때인
세종 즉위년 9월19일 전후해서 입궁하여 겨우 한살 터울로 아우를 보아
모후의 품을 떠나야 했던 수양대군을 주로 업어 키웠던 모양이다.

이런 관계가 결국 수양대군과 끝까지 밀착되어 안평대군을 몰아 죽이는데
그 여섯 아들들과 합세하게 하고 그에게 맡겨 키우게 하였던 막내대군인
영응대군까지도 수양편에 서게 하였던 듯하다.

2월2일에는 의정부에서 각급 학교에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가려 뽑아 사유
로 삼아야만 인재를 바로 길러내어 풍속을 아름답게 할수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당시의 교육정책과 세종의 교육관을 살펴보기 위해 그 일부를 옮겨 보겠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삼가 정명도선생이 조정에 말한 것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천하를 다스려 풍속을 바르게 하는데는 현명한 인재를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마땅히 먼저 예로 대접하고, 근시하는 현명한 선비및 백관들에게 명하여
마음을 다해 찾아내게 하는데, 덕과 학업이 충분히 갖춰져서 족히 사표가
될만한 사람이 있거나, 그 다음으로는 독실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며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을 닦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초빙해 와서
서울에 모이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서로 올바른 학문(정학)을 강하여 밝히게
하십시오"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현명한 인재의 배출은 모두 학교로부터 말미암고 학교가
흥하는 것은 사유를 선택하여 임명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스승으로 그럴만한 사람을 얻게 되면 가르쳐 기르는 것이 바르게 되어
풍속이 아름답고 그럴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가르쳐 기르는 것이 바르지
못하게 되어 풍속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인재의 현부와 풍속의 미악이 모두 이에 관계됩니다.

그러니 사유의 책임은 무겁다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근래 유생들이 오로지 제술만을 숭상하고 경학을 배우려 하지 않아서 훈고
도 오히려 또 밝지 못하니 그런 까닭으로 사표가 될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부학및 외방 교관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으나 이와 같이
현명한 인재를 얻어 풍속을 바로 잡기를 희망한다면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육조및 대간, 집현전, 예문.춘추.성균관과 각급 수령및 임시
관청을 불구하고 모두 마음을 다해 경학에 밝고 행실을 닦아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내어 각기 이조에 알리고, 이조는 본부와 함께 가려 뽑아 이름을
기록하여 상감의 뜻에 따라 임명하여 인재를 길러내고 풍속을 배양하게
하십시오.

만약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학생들이 즐겨 모여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특별히 포상과 장려를 더해주고 차례를 거치지 않고 뽑아
써서 그 성과를 책임지게 하시며 지금 이후로는 서울안 사유의 임명에 이
선발을 거치지 않고 나온 자를 허락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때 나라에서 사유의 책임을 맡은 이들은 거의 다 한미하고 천한
집안 출신의 고지식한 선비로 학문이 짧아 사람마다 모두 경멸하고 천대
하였다.

그래서 좋은 집안의 자제나 권력을 잘 따르는 이들은 비록 경학에 정통하여
밝다하더라도 모두 대각에 이름을 드날리며 5부의 교수관들 보기를 멸시하듯
하였다.

그래서 광대들이 그것을 지적하여 교수관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그것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비록 이 선발을 무겁게 하였으나 구폐를 혁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이 제도에 대한 평가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