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문제로 국민들이 늦더위 속에 신음할때 양궁승전보에
이어 날아온 장승길 이집트주재 북한대사 일가의 망명에 관한 미확인 보도는
한가닥 가을바람과 같이 청량제 구실을 했다.

어제야 미 국무부의 조심스런 첫 발표가 나왔지만 장대사 내외의 비중으로
미루어 그들의 탈북사실자체에 천량의 무게를 싣고 싶어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깝게 오익제씨의 월북사건을 상기하더라도 당국이건 국민이건
장대사 일가의 탈북에 대해 성급한 확대해석이나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은
결코 현명치 못하다.

이미 일부 당국자가 정부의 신중한 대응방침을 제시하고 있지만 과거의
관행으로 보아 아직 마음을 놓기 힘든 단계다.

김일성사후 3년여 북한이 겪은 변화를 누구나 찬찬히 들여다 본다면
그것은 일조일석의 갑작스런 것이 아니라 길고 깊게 원인들이 맞물리고
축적된 끝에 빚어지는 인과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이제까지만이 아니라 변화의 앞길까지도 돌이킬수 없을만큼 정해져
있다고 보는데도 큰 반대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오로지 대안이라면 북한자신이 개혁-개방을 향해 도도히 흐르던
물줄기를 돌리는 길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적에 가까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이런 기적이 일어나도록 남과 북은 힘을 합쳐야 하고,
장대사 일가의 망명문제 역시 그 연장선상에 서야만 한다.

솔직히 말해 당국이건 국민이건 당장 바라는 것은 장대사 일행이
김포공항으로 들어와 귀순을 선언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두를 필요없다.

평화통일의 긴 장정위에서 하루한시가 조급할 이유가 없을뿐 아니라
조급해선 오히려 일을 망친다.

미국의 첫 발표가 너무 간단해서인지 망명의 동기나 경위, 목적이 분명히
밝혀지진 않았다.

그러나 안전만 보장된다면 그들이 한국아닌 미국이나 제3국을 영구
망명지로 바랄 이유란 있을리 없다.

만일 그런 그들에게 딴 뜻이 있다면 오히려 한국쪽에 원인이 있을지
모르고, 이점에서 국민과 언론과 당국은 곰곰이 반성해야 한다.

자유도 좋지만 정신못차릴 정도로 서두르고 들볶듯 설쳐대 귀순자에게
불안을 안겨주는 과오를 저질러선 안된다.

신포의 동해원전 기공식때 북측여성 점원에게 "남북의 남성중에 어떤 쪽이
더 마음에 드느냐"고 불쑥 마이크를 들이대는 설익은 정서를 가지고는 일을
그르친다.

물론 좀더 넓고 멀리보는 안목도 필요하다.

북한의 변화가 이토록 가속되는 도중에 탈북.망명자의 수용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이 맡아 해야 함은 백번
당연하다.

그런데도 한건 한건 예외가 축적돼나가선 안된다는 확고한 관점이다.

이점에 관해 기본 방침이 서야하고 정부주도하에 대내적으로 언론이나
기타 기관들이 협조함은 물론 미.중.일.유엔등 국제적인 협조관행을 역시
한국주도로 확립해둘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