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상은 지금도 트릭을 쓰고 있다.

자기가 돈있는 마누라와 10여년간 살고 얻은 것은 미도견직 하나다.

물론 그는 그것을 스스로 키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신시대 광섬유를
순전히 영신의 머리로 수입해서 한국 굴지의 모든 패션회사들에 싸게
공급함으로써 크게 성장한 무역파트가 더 큰 회사였다.

영신이 그와 결혼한 후에 차린 것이지만 실수는 성질이 급하고 머리회전이
치밀하지 못한 윤효상 쪽에서 많이 저질렀고 회사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된 적도 있다.

지금은 별로 큰 문제가 없지만 아무튼 그 회사는 영신이 없으면 지속하기
힘든 여러 구조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무역쪽에서 특히 그렇다.

그래서 영신은 윤효상과 헤어지더라도 아무 걱정 안 한다.

그녀는 미적 감각이 뛰어났고 많은 외국의 섬유상사들과 오랜 유대와
신용을 쌓아온 베테랑이다.

그녀는 사업에는 진정 강한 여자였다.

다만 열심히 일하는 것 보다는 춤을 추거나 골프를 하거나 그렇게 노는
일에 시간을 쏟아서 김치수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녀는 늘 노는 것에 맛을 들인 머리가 좋은 사업가였다.

윤효상은 영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미스 리를 힐끗 바라보다가 젊고
신선하다는 것 하나로 미스 리를 아내로 삼는 것은 너무 손해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체면에서도 우선 그렇다.

"미스 리, 왜 아까부터 말이 없어? 무엇이 우울해서 그래?"

"사장님, 지금 저는 배가 고파요.

두명분의 식사를 해야 되어서 인지 늘 허기가 져요.

요새는 너무 숨이 가쁠 정도로 먹어요"

"그러니까 아까 약속한대로 오늘 식사한 후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한번만 더 유산을 하라구. 그리고그 다음 아기는 결혼 후니까 마음놓고
나을 수 있잖아? 내 말대로 해줘"

윤효상은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한다.

그러나 미스 리는 아무 대답도 안 한다.

하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하다.

아니 한달 이상이나 고집을 피우며 거부해왔다.

"그렇게 해야 돼. 판사가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을 받게 하면 나는
재판에서 질 수도 있어.

그동안 10여년간 쌓은 연공을 생각해서라도 미도견직 말고 하나 더
건져야겠어. 그래야 우리 미스 리 가난에 대한 상처투성이 인생에 설욕을
하는 것도 되고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안 한다.

만약에 표리부동한 그가 이혼재판이 끝나고 돈을 챙기고나서 자기와
결혼을 안 해준다면 너무 억울하다.

그는 스무살때도 그 전 회사 사장에게 농락만 당하고 결국은 그 사장
부인의 행패때문에 그 회사를 물러났었다.

더구나 영신이 아이를 못 낳아서 선택된 배빌리는 여자같은 자기의
처지를 그는 가장 우려하고 있다.

그에게 10억쯤 확인서를 받고 유산을 해줘야 한다.

그녀는 일종의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배반만 당해온 여자답게.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