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수 회장은 임변호사와 미사리쪽에 있는 경치 좋은 커피집으로 나가서
바람도 쐴겸 소송에 대한 논의를 한다.

수행비서도 안 데리고 단 둘만의 나들이다.

병신이 되도록 얻어맞고 누운 딸 영신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어오르지만
그는 어느때 보다도 침착하다.

김치수 회장의 특징은 무슨 사건이 생기거나 새로운 사업에 투신할때
가장 냉철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를 얼음같이 차가운 사업가라고 하는지 모른다.

그는 결코 쓸데없이 돈을 안 쓸 뿐 아니라 부당하게 쓰지도 않는
유태인같은 사람이다.

지독하기가 개성상인 이상이다.

"그래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있소?"

"상대방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그 도청 테이프가 문젭니다"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는 없을까요?"

"그것은 도둑질이 됩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어떤 방법으로 내가 그 녀석에게 부당한
위자료를 안 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임변호사는 회심의 미소를 날린다.

"따로 제가 쓸 수 있는 소송료를 오백만원만 따로 주신다면 무슨 수를
써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요?"

김치수가 호기심을 잔뜩 품고 묻는다.

그럴 때의 그는 소년같은 눈빛이다.

그의 그러한 호기심들이 그를 모험적인 벤처사업에서 크게 부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고 일단 게임에 임하면 결코 져서 물러서는 법이
없는 무패의 기록을 가진 사나이다.

그의 칠십평생이 그렇게 모험과 프런티어 정신으로 꽉 차 있다.

그는 조용하지만 이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무서운 집념의
화신이다.

얼음 더하기 돌의 냉혈한이다.

"나는 우리 영신이가 당한 것이 내가 얻어맞은 것과 같다고 봐요.

그러니까 부당한 위자료는 절대로 줄 수 없어요.

돈은 낼게요.

그러나 단서가 붙어.나미견직 외에는 아무 것도 안 주도록 승소해야
해요"

"좋습니다.

사실 오백은 너무 적은 액수입니다.

회장님께서 제가 고학할때 장학금을 대주신 은혜를 생각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모험입니다"

임변호사는 그 녹음테이프를 돈을 주고 빼든가, 아니면 없애버리려고
궁리해본다.

또 한가지 방법은 저쪽 변호사가 양재동의 빌딩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데
로비자금으로 쓸까,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짜본다.

문제는 평화적으로 이기면 성공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도 저도 안 되면 영신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김회장에게
은근히 겁을 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