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권 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종이 처음 집현전을 설치하고 글 잘하고 공부잘하는 선비들을 이끌어
들이니 박인수(박팽년의 자), 성근보(성삼문의 자), 유태조(유성원의 자),
이백고(이개의 자), 하중장(하위지의 자)이 모두 일시에 이름을 떨치었다.

그런데 근보는 글이 난만하고 호방종일하였으나 시에서 부족하고, 중장은
대책과 소장에서 뛰어났으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태초는 천재를 타고
났었지만 본 것이 넓지 않았고, 백고는 맑은 재주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시도 또한 빼어났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박인수를 추천하여 집대성으로 삼고, 그 경술과
문장과 필법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죽임을 당하여 그 저술한 바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이토록 집현전 학사들 중 모든 재주에 겸비하였다고 칭송되던 박팽년인지라
벌써 16세 소년시절에 성균관 유생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숙성한
면모를 보인다.

성균관의 동문친구인 조상충이란 소년이 전라도로 벼슬살이를 떠난 부친을
근친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그를 기념하는 글을 부탁하자 지어준 글인데,
부귀가의 자제가 학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칭송하고 이번 여행길이 혹시
오락에 빠지는 계기가 될지 모르니 경계하라는 내용을 유려한 문체로 확고한
자기 의지를 반영하며 전개하고 있다.

지금 중학교 3학년쯤 되는 16세 소년들의 귀감이 되겠기에 전문을 다 옮겨
보겠다.

"조생 상충은 내 친구이다.

임자(1432)년에 내가 성균관에 나이가 되어 입학하니, 조생도 역시 문음
으로 입학하였다.

나이는 아직 어린데, 두각이 우뚝하고 웅지와 도량이 빼어나게 커서 나는
진실로 마음을 허락하였다.

그 후에 내가 과목을 더하여 있는 곳이 비록 달랐으나 교분은 이미 독독
해서 상종하기를 자주하였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호남을 진무하러 나가시어
달포가 되었으므로 내가 장차 뵈로 가려하는데 자네가 한마디 말을 해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부터 훈벌집안의 귀한 자제로 학문에 뜻을 두는 이는 드물었다.

비단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에 물리며 매일 성색에 빠져 정신을 잃고
팔뚝에 활을 메고 허리에 화살을 차고 호기를 놓아 바람을 일으키는데 어찌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비비며 한장 한권의 책인들 읽으려 하겠는가.

조상들이 덕을 쌓아 겨우 문호를 세웠는데 후세 자손이 도리켜 다시
무너뜨린다면 어찌 정녕 슬프다고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이제 조생은 여러대 내려온 귀족으로 집안이 대대로 빛나거늘.

절대 교만하거나 뽐내는 빛이 없고 선비의 바탕을 다지는데 부지런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으미 참으로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이제 이번 가는 길에 있어서 나는 한편으로 기뻐하며 한편으로 두려워한다.

바야흐로 천리 밖에서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홀로 서 시전과
예기를 들려 드리어 자욱한 화기가 집안에 가득할 터이니 나의 기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듣자니 호남은 본래 아름답고 화려한 땅이라 간드러진 노래와
농염한 미색이 사람의 마음과 눈을 방탕하게 하고 더하여 홍련 막하(해남의
병영)에 누령개와 푸른 매가 쉽게 사람을 중독시킨다고 한다.

조생은 나이 어리고 기세가 날카로운데 만약 뜻을 머물러 둔다면 학문의
길은 아마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그 사이에 두려움을 두지 않겠는가.

생은 의당 가서 부모님을 뵙고 난 후에 반드시 빨리 돌아와서 그 학업을
넓혀 나가야 한다.

내가 생과 친한지가 오래이라 감히 이로써 경계하노라"

한편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은 세종 9년(1427) 정미 3월14일에 명 선종의
등극을 경하하는 하등극과의 친시방에서 중시을과 2등 9인중 1인으로 급제
하는데 이때 이미 집현전 수찬(정6품)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세자의 사부로
서연에서 최만리와 함께 왕세자(문종)를 교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세종은 세종 13년(1431) 10월29일 경연에서 육전을 처음 강의하면서
서연관을 집현전 학사로 겸하게 하는 겸관제도를 바꿔서 상임하는 녹관으로
바꿔야 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세자(당시 18세)가 박중림(당시 32세)
과 최만리에게는 질문을 잘하는 것은 이들두사람이 오랫동안 세자를 시종
하여 서로 친한 때문이고 처음 보는 서연관에게 질문하지 않는 것은 낯이
설어 부끄러워 하기 때문이니 서연관은 세자를 오래 시종하여 서로 친해지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이렇듯 박중림이 왕세자의 사부로 왕세주(문종)의 근위세력이 되어 있는
중에 박팽년을 성균관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리면서 불과 16세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니 왕세자가 3세 아래의 동생뻘인 박팽년을 불러 보고 싶지
않았을리 없다.

이런때 박팽년이 위에 든 "조상충이 호남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는 머릿글
(송조상충귀호남서)"과 같은 명문장을 짓게 되자 그 글이 더욱 왕세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박팽년은 16세인 성균관 생도 시절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나서 왕세자인 문종과 사귀게 되는 듯하다.

뒤이어 2년 뒤인 세종 16년(1434) 갑인 3월9일 알성과에서 생원 박팽년이
18세로 2등 7인중 1인으로 급제하자 왕세자는 세종께 고하고 바로 집현전
정자(정 9품)로 발탁하여 집현전 학사의 대열에 끌어들인다.

평생 학문을 함께하는 도반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해 2월26일 세종대왕은 윤회 권도 설순 등을 불러 집현전에
모이게 하고, "자치통감"을 살펴보아 그 뜻이 어려운 대목은 "원위", "즙람",
"석의" 등 여러 책을 참고하고 그 해석을 달아 놓도록 하며 이 책을
"통감훈의"라고 이름지으라 명한다.

이 일에 집현전 응교 김말, 교리 유의손, 수찬 이계전, 부수찬 회항등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박중림, 박팽년 부자도 여기에
끼인다.

이에 세종대왕은 7월1일에 "자치통감훈의"의 찬집관들을 모두 불러서
잔치를 베풀어 먹이고 매월 15일마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7월2일에는 집현전 직제학 김돈, 직전 김빈, 호군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경연 소장의 "효순사실", "위선음등", "논어" 등 소위 위부인 자체
로 되었다는 좋은 활자 판본을 꺼내어 이를 자본으로 하고 부족분은
진양대군(수양대군) 유에게 쓰게 해서 20여만 자의 활자를 만들어 내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갑인자로 조선왕조 활자중 가장 아름다운 서체를 자랑하는
금속활자이다.

아울러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명하여 활판을 개조하게 하여 활판 인쇄술을
혁신하니 이로부터 매일 40여장씩을 찍어낼 수 있는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7월16일에는 새로 주조한 큰 글시 활자로 "자치통감"을 인쇄해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치통감훈의"의 편찬은 쉽지 않아서 해를 넘기게 되고 다음해
3월5일에는 조수라는 이가 원나라 "호삼성이 음주를 붙인 자치통감" 1백권
으 바쳐서 "통감훈의" 편찬에 큰 도움을 주게 되는제 조수가 바친 책이
결권이 많아 이를 채우려고 세종은 사방으로 구구유전관을 파견하여
"호삼성음주자치통감"을 구득해 오게 한다.

이때 집현전 박사(정7품) 김자호(자호는 누구의 자인 듯)라는 이도
구구유전관이 되어 고향인 경상도로 책을 구하러 내려가서 유문 비전을
많이 구해 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김자호는 경상감사 김효정(박중림과 세종 9년 중시 동방
친구이다)과 만나고 김효정이 시를 지어 그 공로를 치하하자 이 시를 가지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창화시를 부탁하고 박팽년에게는 그 서문을 지어 달라
하여 이를 얻게 되는데 박팽년이 20세되던 해인 세종 18년(1436) 병진 4월
이후의 일이었다.

이 문장 역시 도저히 20세 청년이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글발이
유려하고 서술이 빈틈 없다.

"김대박이 영남으로 사명을 받들어 가는 것을 보내는 머리글
(송김대박봉사영남서)"이라는 제목의 이 글을 일부만 옮겨 보겠다.

"선덕 갑인(1434) 가을에 상감께서 유신들을 집현전에 모이게 하여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도록 명하시니 대개 우리나라의 서적이 적어 사학
이 넓지 못한 것을 걱정하신 때문이다.

이때에 무송 윤 문도공(회,1380~1436,3월12일에 졸)이 수석으로 이 명을
받들고 영가) 권공 도(1437년7월17일에 세종의 이름인 도와 음이 같다하여
피휘하기 위해 제로 개명한다), 하동 정공 인지, 월성 설공 순, 계성 이공
선, 영가 김공 돈, 탐진 안공 지, 영가 권공 채가 모두 일시의 웅문거필로
편집의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또 문학지사들을 뽑아서 궁중에 모아서 사전을 탐구하여 정수를 모아 책을
이루어 내게 하였으나 아직 탈고하지 못하였는데 을묘년(1435) 봄에 송월당
거사 조공 수가 원조 "호삼성 음주 통감"을 얻어 바치니 그 주석이 매우
자세하여 상감께서 아름다워 하였으나 다만 편질이 많이 빠져 있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빠진 것을 나라안에서 두루 구하고자 하여 문신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며 그 벼슬을 구구유전관이라 하였다.

이때 경상도에 사명을 받들고 간 이가 무릇 넷이었는데 박사 김공 자호도
그 하나이다.

명을 받들어 삼가하고 두려워하며 찾아내기를 남김없이 하니 소위 "음주"
라는 것은 비록 얻지 못하였얻 남긴 글과 숨은 책들이 나온 것은 자못
많았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본 감사 김공 효정이 시를 지어 보내었다.

이때 자호가 장차 화답하는 시를 구하고자 하여 나로 하여금 그 서문을
지으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