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건 <세종대 이사장>

1929년 10월24일 뉴욕의 주가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연쇄적으로
기업도산과 은행도산으로 이어져 급기야 공업생산고는 44%나 줄었고
임금수준도 절반 이상 떨어졌으며 노동인구의 4분의1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 파문은 전세계로 확산되었으며 결국 루스벨트 정권이 등장하여
경기부양책을 주도하는 정책의 대전환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또한 이것은 독일의 공황을 촉발하여 히틀러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에야 공업생산이 공황전 수준을 회복함으로써
경제와 정치는 양수레바퀴와 같음을 확인시켰다.

작금의 한국의 연쇄적 기업부도와 이에 따른 금융공황의 위기설은 미국의
대공황의 서막과 너무나도 흡사한 점이 많아 한번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부실채권의 누적과 유가증권 평가손으로 일부 시중은행이 경영위기에
처하자 한은 특융 문제가 연일 거론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대립되고
있는 찬반양론은 금융위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즉 한쪽은 "현실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다른 한쪽은 시장원리 중시의
"이론적 인식"에 근거를 두고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금융위기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대공황 전에 학계와 정부간 대논쟁의 맥락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최근 우리 경제가 처해 있는 현실은 일찍이 유례없던 최악의 상태로
1995년 이래 지속된 경기하락으로 기업들의 재고가 쌓여가고 1988년이래
임금은 5배 오르고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고치까지 확대되었으며 환율은
25%평가절하되었다.

이에 한보 삼미가 이미 부도 처리되었고 진로 대농에 이어 기아마저
부도유예업체로 지정되는 등 실물경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

대형 거래업체들의 도산으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 규모가 자기자본을 크게 상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보사태 이후 가중되었던 자금부족 현상은 6월을 고비로 다소
진정되었으나, 기아에 대한 부도방지협약 적용으로 일부 은행들의 자금결제
능력에 문제가 발생하고 금융권 전체의 리스크가 우려되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심각성은 더해진다.

한보사태 이후 중장기자금 조달 금리가 0.7~0.8%이상 치솟아 일부 국내
은행들의 해외기채가 사실상 어려워졌고, 단기차입의 많은 부분을 하루
콜자금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보사태 이후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일부 국내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데 이어 이번 기아사태로 또다시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신용등급을
재조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은행들은 신용등급이 더 내려갈 경우 정크본드 수준의 투기적
등급으로 분류되어 국제영업에 많은 제약을 받게될 전망으로서 금융공황이
해외시장으로부터 발생할 징후도 엿보인다.

여기에 소로스 등 외국의 투기적 펀드들이 원화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동남아를 휩쓸고 지나간 외환위기가 우리에게까지 몰려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외국의 금융당국도 한국 은행들의 경영난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아사태 이후 한국 은행들의 신용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방한 예정인
미국연방준비은행의 외국은행감독 부국장은 국내 은행들의 외국지점 진출시
정부의 보증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외국은행도 일부 국내은행에 대해 유가증권 평가손과 부실채권을
보수적으로 계상한 BIS 기준의 재무자료를 요구하면서 경영상태가
기준에 미달한 경우 영업을 제한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아직은 예금인출사태나 금융공황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지만 국내의
금융시장에는 일측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국내외 여건을 감안해 볼 때 한은 특융에 대한
대립되는 두가지 인식 중에서 "현실적 인식"이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형은행의 도산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뿌리째 흔들고 심각한
국가위험에 빠져들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금의 금융위기가 관치금융의 업보라고 볼 때 비록 앞으로 나아갈
길은 시장원리에 따른 자율경영이 순리이지만 지금의 사태는 책임의 소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상화를 시켜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간과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개별은행의
도산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원론적 도그마에 얽매이다 보면 한은 특융의
적기를 놓쳐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금융제도의 붕괴는 국민경제에 미치는 외부효과가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때로는 물가에 부담이 되고 시장원리가 다소
손상되더라도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유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1980년대 말 미국의 14대 은행이었던 컨티넨털 일리노이나 1992년
스웨덴의 4대은행인 노드은행이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을 때 정부가 대대적인
지원을 하여 경영을 정상화시킨 적이 있다.

한은특융이 WTO의 특혜금지조항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이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위한 긴급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심장마비환자에게는 필요에 따라서 전기쇼크와 같은 극단적 조치를
해서라도 일단 고비를 넘겨야 추후에 정상적 치료를 할수 있는 것처럼
한국의 금융위기도 원론적이고 정상적 방법만으로 치유할 단계를 이미
넘어섰으므로 명확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론 경영난에 빠진 은행들이 한은 특융을 받기 위해서는
환골탈태의 자구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