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사 - LA타임스 신디케이트 독점전재 ]

러시아는 냉전에서 참패했는가.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자존심마저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게 알렉산더 레베드
전 러시아 국가안보담당특별보좌관의 상황인식이다.

서방은 이같은 보이지 않는 국제정치적 요소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의 주도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과
국제질서재편의 과정에서 레베드의 시각은 러시아 보수세력이 지닌 국제
정치인식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뷰포인트에 기고한 그의 글을 싣는다.

< 정리 = 김홍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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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냉전에서 참패했다는 얘기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얘기다.

분명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현 러시아 경제상황은 지금까지의 개혁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의제인지 모른다.

이러한 패배의식이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지면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서유럽인들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대해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한다.

승리자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같다.

다시말해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한 승리를 러시아인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는 것같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인식의 오류가 아닐 수 없다.

패배에 따르는 굴욕감과 상실감이 러시아인들에게 뿌리박힌다면 이같은
굴욕감과 상실감은 결국 냉전시대의 적대국들을 누르고 승리를 쟁취해야
극복되는 열등감을 낳게 된다.

러시아인들을 이렇게 자극하는 것은 크나 큰 실수일 수 있다.

NATO가 정치, 군사적인 영역을 동유럽쪽으로 확대한 정책이야말로 서유럽
국가들이 저지르는 착오와 실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NATO지도자들과 서유럽정치인들을 여러차례 만나본 결과 알게 된 것은
"일곱번을 재어본 후 한번에 잘라야 한다"는 러시아의 속담이 서유럽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향후 일어날 결과도 재어보지 않고 가장 단순한 해법을 경솔하게
구하려고 한다.

NATO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와의 "대화"과정에서 아직 힘의 우위전략을 찾고
있다.

구소련과 오랜기간 대적하는데 익숙했던,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유럽의 정치인들과 군사전략가들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
했다고 판단,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하고야 말겠다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소련의 위협이 이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러시아를 유럽의 뒷마당으로 밀어부치고도 유럽의 안정과 유럽의
앞일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서유럽의 이같은 접근방식은 의혹의 눈초리만 키울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승자와 패자의 관계란 이런 식으로 엮어져 왔다.

이런 논리를 이해한다면 역사가 가르쳐주는 두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를 비롯해 모든 일에 있어 균형감이 조화와 안정의 기초라는 게 그
첫번째 교훈이다.

누구든 자기방어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균형감을 상실하면 정의는 타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머지않아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두번째 교훈은 승자가 패자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패자는 독이 올라 위험하기 때문이다.

균형감을 찾지 못했던 예는 지난 1919년 연합국들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 베르사이유조약을 강요했던 점이다.

당시 심한 굴욕감을 느꼈던 독일인들은 전쟁을 일으킨데 대한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요된 베르사이유조약은 전쟁에 패한 독일인들에게 복수의 독기를
품게 했다.

베르사이유조약이 체결되기 얼마전에 이미 러시아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영토와 군대는 확대됐다가도 축소되고 강했다가도 약해지지만 한 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유럽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국지전은 하나의 무시못할 위험요소며 반드시
공동노력을 통해 다뤄져야 한다.

공동노력은 힘을 통해 이뤄지며 힘은 바로 보편적인 수단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정교에 잡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생존방법을 강력히 거부하는 체첸인들의 자립정신에
이르까지 모든 복합적인 요소들이 뒤엉켜 있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공동의 힘"이 요구된다.

NATO는 여러가지 기초적 국가형성 기능 등에 있어서도 힘에 의존하고
있다.

법적 테두리를 정하고 내부갈등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이 힘이기
때문이다.

보스니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원하든 원치 않던 NATO는 자율적인 통치구조를 가진 전혀 새로운 "제국"의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또 이 "제국"은 역사상 제국들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번성하다가 필연적
으로 붕괴될 것이다.

최근 NATO의 조직체제변경은 이런 과정을 잘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와해되고 나서 NATO는 급변하는 상황속에서 새로운
생존방법을 찾아야 했다.

해결책이란 행동범위를 넓히고 새로운 멤버들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 필연적인 결과는 구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붕괴됐을 때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필연성을 서유럽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럴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NATO체제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외부에 대한 위협을 끊임
없이 모색하고 있다.

NATO의 가장 위협적인 외부의 적으로는 흔히 유럽의 "남쪽지역"과 "동쪽
지역"이 거론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NATO는 동쪽의 최대 위협요소로 이란이나 이라크
중국을 꼽고 있지는 않다.

러시아다.

독립국가연합(CIS)의 영토위에서 무언가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려는,
새로이 NATO의 멤버가 되고자 하는 동유럽국가들에게 다시 핵미사일을
겨누려고 하는, 우크라인을 위협하려고 하는 러시아 본토의 정치인들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으르릉거리고 있다.

또 다시 힘의 균형, 힘의 역학관계란 냉전시대의 원칙이 준동하고 있다.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의 회귀때문에 최근까지 유럽과 세계에 안정을
제공해 왔던 협의체제가 위협받고 있다.

유럽의 재래무기감축조약 상호군사신뢰조치들 핵무기감축협약 등 모든
협의체제를 재고해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달성했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NATO체제를 유지하고 그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흔히 끌어다대는 논리가
"NATO을 통해 미국이 유럽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유럽의 군사적 방위를 위해 기꺼이 비용을 치르는 미국에
유럽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부유럽이나 동부유럽국가들이 서둘러 NATO체제에 편입되고 싶어 안달
하는 이유도 이러한 기대에서 찾을 수 있다.

"방위"란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들 국가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자본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중부유럽이나 동유럽국가들이 NATO에 가입하는 전제조건
으로 이 지역에서 피어나는 민주주의의 기운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을 자기통제하에 두기 위해 NATO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게 NATO는 러시아를 세계정치의 가장자리로 내몰기 위해
필요한 수단인 것이다.

[[ 약력 ]]

<>1950년생
<>라잔공수사관학교 졸업
<>러시아 제14군 사령관 역임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역임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6일자).